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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Mar 24. 2022

님아, 그 술을 끊지 마오

매월당 김시습의 『추강 남효온 선생께 보내는 글』

전쟁, 흉년, 전염병. 이 세 가지를 합쳐도 술이 끼치는 손해와 비교할 수 없다.     

- 글래드스턴 -   


       

 술의 해악에 대해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술은 거의 악(惡)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천편일률은 아닐 지라도 대다수의 종교인들은 금주를 한다. 육체적 쾌락을 지양하고 정신적·영적 수양을 통한 지고지순(至高至純)의 경지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술은 복수(複數)의 인격을 현출시키는 회피의 대상일 뿐이다. 웬만하면 극기상진(克己常進)이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외치며 정신력으로 술을 이겨내 볼 법도 한데, 색(色)과 더불어 우선 피하고 보는 것은 술의 마성(魔性) 때문이리라. 이번에 살펴볼 ‘답추강서(答秋江書)’는 조선 전기의 인물 김시습(1435~1493)이 추강(秋江) 남효온(1454~1492)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전날 뵈었을 때 선생께서는 술을 끊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주성(酒星)을 하늘 감옥에 가두고, 취해 살던 지난날들을 진시황이 분서갱유하던 구덩이에 함께 넣고 태워 버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은 아름답다면 아름답다고 하겠습니다. 저 하나라의 걸왕이나 은나라의 주왕도 술 때문에 망하였고, ()나라와 송나라의 선비들도 술 때문에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이 술은 만세를 두고 마땅히 경계해야 할 물건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주장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19세(혹은 20세) 아래인 남효온에게 김시습은 언제나 ‘추강 선생’이라고 하며 깍듯이 대하였다. 추강은 홍유손, 정희량과 마찬가지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제자이며 동시에 청한자(淸寒子) 김시습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시습의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으로 여러 가지이다. 세 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한자를 배워 5세에 한시를 지었던 신동으로, 당시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이 사실이 알려졌다고 한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본 후 장차 크게 될 재목이니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五歲, 5세)’라는 별호를 얻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시습도 위 추강에게 보낸 편지에서 역사적 인물을 예시로 들어 술의 만행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술에 대한 통설(通說)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소수설(小數說)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고인이 술자리를 베푸는 뜻은 본래 선영에 제사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며 노인을 봉양하고 병을 다스리려는 데 있었습니다. 복을 빌고 즐거움을 나누는 백복(百福)의 자리에서는 술이 아니고는 안 되었으니, 술이 처음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주정을 부리고 덕을 잃고 행실을 어지럽히고 몸을 망치게 하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옛 사람들이 술을 빚을 때 독하고 매운 술만을 좋은 술로 여긴 것이 아니었지요. 진한 향취가 나는 술로는 맑은 술도 있고 진한 술도 있으며, 달고 맛있는 술로는 기장 술도 있고 단술도 있었으니, 맑고 탁하고 진하고 싱거운 차이가 있었습니다.      


혜원 신윤복이 그린  '선술집'이라는 그림. 국보 135호 이다.


 모든 것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기 마련이다. 매월당은 술의 순기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역기능에만 천착(穿鑿)하여 한때 자신과 보내었던 즐거운 시간들을 모조리 도말(塗抹)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추강에게 친절한 항의를 함으로써 서운함을 나타내고 있다. 예상되는 반론을 먼저 처리한 후 승산없는 자신만의 소수설을 개진하는 김시습의 논지전개 방식과 그 수준은 ‘천재’라는 그의 수식어를 무색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공방(攻防)에 있어 기본적으로 불리한 논리의 돗자리를 펴고 있음에도 술의 순기능을 증폭시켜 일견 미증유(未曾有)의 궤변으로 보일 수 있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보아 매월당이 오늘날 살아있었다면 필경 실력있는 변호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술을 마셔야 할 경우를 들어봅시다.  (중략)

 이런 점은 살피지 않고 도리어 술이 재앙만 부른다고 생각하고는 다만 술을 뚝 끊어 버리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밥을 지으려다 불을 낼까봐 일생 동안 밥짓는 불을 지피지 않으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오로지 술 주정이나 하는 짓은 말할 거리도 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술을 뚝 끊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중용의 도에도 심히 어긋나 군자들이 행할 바가 아닙니다. 만일 술을 끊는 것이 맞는 일이라면 공자께서 "술을 아무리 마시더라도 난잡해지지는 않았다"고 하고, "술로 인하여 곤경에 빠진 일은 없었으니, 술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라 무령공도 과음에서 오는 폐단을 크게 뉘우치고 "석 잔만 마셔도 정신이 없는데 어찌 더 많이 마시겠는가"했습니다. 무령공도 술을 완전히 끊지 않고 다만 경계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2002년에 개봉한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이란 영화에서 그라마톤 성직자(The Grammaton Cleric)들은 인간들의 변덕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감정이 인류에게 크나큰 피해를 주는 것을 깨닫고는 독재자의 통치 하에 ‘프로지움’이라는, 감정을 통제하는 약물을 강제로 전 국민에게 주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증오와 분노 그리고 폭력과 살인 등을 유발하는 감정의 동요없이 절제된 이성으로만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 독재정부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주인공 ‘존 프레스턴’은 오히려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이 정책에 대항하며 인간의 감정을 자유롭게 회복시켜 나간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인류를 위협하는 범죄와 전쟁이 ‘감정의 동요’로부터 나온다 하여 ‘감정’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더 큰 우(愚)를 범하는 것임을 이 영화는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이퀼리브리엄' 중의 한 장면. 사이비 종교와 결합된 독재정권이 '공공선'을 명목으로 전국민에게 약물을 강제로 주입하는 통제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러니 술을 절제한다든가 삼간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종신토록 완전히 끊어 버린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는 바입니다. (남효온)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시습은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물론 비범했으나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李滉)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대표적인 그의 저서 <금오신화>의 다섯 편의 작품은(이생규장전, 만복사저포기,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지나친 전기(傳奇)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해괴망측 하기까지 하다. 유교를 바탕으로 불교적 사색을 시도하였고,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를 해석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선가(禪家)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해보는 등 유·불·선 모두를 통섭(通涉)하였는데, 당시 불교를 천시하고 이단시 하였기에 김시습과 같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은 제도권에서 결코 환영받을 수 없었다.      

김시습의 초상화.  율곡 이이(李珥)의  "율곡선생전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김시습의 외모는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한다. 필자가 알기론 살집도 꽤 있었다.


 매월당 김시습의 『추강 남효온 선생께 보내는 글』은 권주(勸酒), 즉 술을 사랑할 것을 권하는 수필이다.

금주(禁酒)를 고결한 인품 내지 숭고한 종교적 신념을 추구하는 행위로 믿는 사람들에게 이 글은 견강부회(牽强附會)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술은 아무리 훌륭한 인격자도 순식간에 파렴치한, 성추행범으로 만들 수 있는 악마의 속삭임일 수 있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마시지 않느냐는 행위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도 본질을 흩뜨리는 악마의 교란작전인 것이다. 고상함과 존귀함은 ‘금주’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금주는 술을 끊는다는 의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김시습은 추강 남효온 선생께 ‘헛수고 하지 마시라’라는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후에 남효온은 김시습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중의 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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