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과 선택

난 당신 때문에 시간을 건너 왔어요. 사랑합니다. 언제나 사랑했어요.

by 이재명

1984년에 처음 개봉한 미국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 시리즈는 전세계적으로 특히 통쾌한 액션에 열광하는 남성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 물론 필자도 그 중의 한명이었는데, 이 영화는 단순히 오락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통찰과 직관, 그리고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점들이 많았다.


영화는 2029년을 배경으로 하여 시작한다. 이미 인류는, 자각능력이 생겨 인간을 적으로 규정한 AI(인공지능)가 야기한 핵전쟁으로 인해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그나마 잔존한 인류는 AI가 조종하는 기계에 대항하여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지만 사실상 기계에 의해 학살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 ‘존 코너’라는 영웅이 나타나 기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데...


핵1.jpeg 영화의 한 장면. 인공지능 스카이넷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무차별 핵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핵보유국들의 도미노 보복 핵공격으로 인류가 멸망한다는 설정이다.


기계는 ‘존 코너’로 인해 자신들이 패배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과거로 T-800 이라는 사이보그 로봇을 타임머신을 통해 보내어 존 코너의 어머니(사라 코너)가 코너를 임신하기 전에 그녀를 살해하려고 한다. 이를 안 인류가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과거로 한 명의 군인(카일 리스)을 보내어 T-800 이 사라 코너를 죽이지 못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기본 스토리이다.

타임머신을 이용한 시간여행 및 첨단 과학기술의 향연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SF영화의 표피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내골격은 인류에 대한 디스토피아(dystopia)를 전제하며, 실존주의 철학을 재구성하는 듯한 계몽적인 성격은 필자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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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영화의 한 장면과 개봉 당시의 포스터. 주연 배우의 이름의 발음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참고로 인간 대신에 전장에 투입될 살인로봇은 실제 출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과 과소평가하는 것. 이 가운데 무엇이 더 폐해가 클까?



양자 모두 반가운 선택지는 아닐 뿐더러 판단 오류의 그 쓰디쓴 대가는 치욕적이기까지 하다. 필자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쪽에 치욕의 추(錘)를 하나 더 얹고 싶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외침은 일견 자기의 현실과 정체성, 나아가 본인의 한계를 잘 파악하고 있으라는 성찰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깨달으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존 코너는 미래에 자신이 기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인류의 지도자가 되리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기에 길고 긴 10대의 시절을 방황하기만 한다. 우리 또한 미래를 보았다면 결코 지금과 같이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현재에만 충실한 나머지 ‘미래의 나’가 보았을 때 후회할 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미래의 나’‘현재의 나’에게 어떠한 말을 전하고 싶을까? 마찬가지로 ‘지금의 나’‘과거의 나’에게 무슨 말, 아니 어떤 경고를 하고 싶은가? 전자의 말을 ‘기회’라고 한다면, 후자의 말은 ‘후회’가 될 것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우리는 미래의, 또다른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목소리를 들어야만 우리가 인생을 더욱 값지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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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도 미래의 자신에게 할 말이 많았을 것 같다. 어찌 보면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그가 아빠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네가 과연 여기로 보낼수 있었을까?


- 사라 코너 -


인류의 지도자가 된 미래의 존 코너는 자신의 아버지가 될 운명인 ‘카일 리스’라는 군인을 과거로 보내 T-800 으로부터 젊은 시절의 자신의 어머니를 보호하도록 한다. 비록 카일 리스가 고도로 훈련된 군인이라 할지라도 AI로 운용되며, 티타늄 합금의 내골격을 가진 T-800 의 상대가 될 리 만무할 텐데 사지(死地)로 보내버린 것이다. 결국 카일 리스는 아들로부터 받은 명령인, 어머니를 보호하는 임무를 완수하지만, T-800와 함께 죽고 만다. 어머니 사라 코너는 카일 리스와의 짧은 만남으로 존 코너를 임신하며 시간여행의 패러독스(paradox) 열차를 출발시킨다.

우리가 ‘먼 미래’에서의 내 목소리를 찾는 것 말고도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래는 우리가 하는 지금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고 미래학자 앨런 케이(Alan kay)는 말하기도 하였다. 미래는 우리에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분 뒤도 미래이기에 먼 미래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미래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미래에 대한 통찰과 직관 외에도 종교적인 특질을 전반적인 플롯(plot)에서 보이고 있다. 미래에 인류의 구원자 존 코너가 나타나 기계, 즉 악(惡)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설정은 기독교에서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흡사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는 영화에서 존 코너의 어머니 사라 코너에 해당될 수 있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왕은 사라 코너와 존 코너를 죽이기 위해 미래에서 온 T-800 과 오버랩(overlap) 된다. 또한 아버지인 카일 리스가 죽을 것을 알면서 과거로 보내야만 했던 존 코너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아시고도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야 했던 하나님을 연상케 한다. 사실상 이 영화는 기독교의 교리를 SF영화로 각색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물론 개봉 당시를 기준으로 상당히 파괴적이고 과격한 액션과 가까스로 겨우 공감할 수 있었던 AI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 설정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통찰과 직관, 종교적 측면은 영화에 대한 감상과 고찰에서 간과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오히려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AI가 일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이 시점, T-800 이 현실화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약 40년 전 이 영화가 탄생했을 당시 먼 미래에 해당했을 지금 2025년은 놀랍게도 영화가 예측했던 정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안타깝지만 상상력의 발현인 영화를 통하여 인류의 미래를 직감했음에도 우리는 이 방향을 선택해왔고, 앞으로도 그 방향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우리의 선택을 이끌고 있다. 사실 예측이 곧 선택인 것이다.


스카이넷.jpeg AI 시스템 스카이넷과 T-800 의 내골격. 40년 전에는 공상과학영화의 소재였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물론 우리가 예측했던 바이다. 예측은 곧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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