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진 ‘벤허(Ben Hur)’라는 영화는 사실 미국의 작가 루 윌리스(Lewis Wallace, 1827~1905)가 1880년에 발표한 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이 소설은 출간 후 50년간 꾸준히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후 영화화가 된 여러 작품 중에서는 1959년 개봉한 헐리우드 영화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예루살렘의 귀족인 ‘유다 벤허’가 어렸을 적 친구인 '메살라'를 다시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메살라는 로마군의 간부가 되어 로마의 반란자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옛 친구인 유다에게 반란자들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요청하지만 유다는 차마 동족을 밀고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한 둘 사이의 앙금은 이내 발생한 옥상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더 단단하게 융기해버리고 만다. 로마의 새 총독이 부임하여 유다의 집 옆을 행진하게 되었는데, 이를 옥상에서 구경하던 유다의 가족이 실수로 지붕의 기와를 떨어뜨려 총독을 다치게 한 것이다.
고의가 없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음에도 메살라는 자신의 안위와 출세를 위해 친구 유다를 노예선에 팔아버리고, 유다의 어머니와 여동생 또한 감옥으로 끌려가 유다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지인의 배신은 더 이상 고전에만 있는 스토리가 아닐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변했다’라는 말은 개전 내지 개선이 아닌, ‘변질되었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보통 변하는 쪽은 겉보기에 능력이 있고 기회를 잘 포착하는 기회주의자 혹은 승부사의 면모를 보이기 마련이다. 더 유리한 위치에서, 더 화려한 모습으로 도무지 변하지 않는 유다의 어리석음을 조롱도 하지만 결국 승리의 깃발은 고지식해 보이는 그 친구에게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오랜 시간 경험해 왔다.
영화에서 유다 벤허는 자신이 노예선으로 있는 갤리선이 해적에게 습격을 받았을 때 로마 사령관을 구조하게 되고, 이 공적으로 인해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사령관의 양자가 된다. 양자로서 지위와 유산을 가지게 된 유다 벤허가 다시 메살라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칼을 갈기 시작하는데...
유다는 새로 부임한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의 전차경주를 통해 메살라에게 설욕하기로 다짐한다. 유력한 우승후보인 메살라는 자신의 전차 바퀴에 칼날을 장착하여 다른 경쟁전차를 무참하게 파괴하는 등 승부에 광적으로 집착하지만, 끝내 벤허를 이길 수는 없었다. 지금은 원수가 된 옛 친구 벤허와 전차 대결을 하다가 전차 바퀴에 깔리고 만 메살라는 죽어가면서도 벤허를 조롱하고 저주하고야 만다.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 1923~2008)이라는 굴지의 배우를 주연으로 한 1959년의 이 영화는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세트장, 가장 많은 제작비 투입 등 많은 면에서 기록을 경신하였다.
우정과 사랑을 비롯하여 보통 친밀했던 관계는 한쪽의 마음이 어떠한 요소에 의해 흔들리면서부터, 그리하여 변해가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내가 우월해 보일 때에는 상대방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샘솟고, 반대로 내가 열등해 보일 때에는 상대방의 모든 말과 행동 및 태도가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사실상 서로의 상황이 평행선을 달리기는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우정과 신의와 같은 긴밀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변하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속성이며, 변하지 않고 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만 있는 것은 도태되고 썩을 뿐이라는 궤변을 조심스레 할 수도 있겠다. 나아가 중요한 것은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상대방이, 혹은 내가 변했을 때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인지’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만물이 변하듯 사람 또한 변하는 것은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변화가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리고 끝내 개전의 정이 없는 것이라면 애드거 알랜 포의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처럼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변해버린 나의, 우리의 친구와 그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단순한 변화 그 자체는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하지만 ‘변질’은 메살라를 떠올리는 것 말고는 다른 단상(斷想)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