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시에서 벗어나라 !
지금으로부터 약 23년 전 해병대 1사단 기습특공대 보병으로 근무하다가 첫 휴가를 나온 날, 나의 아버지께서는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눈동자만 반짝반짝 빛나는 나를 보시고는 흐느껴 우셨다. 그도 그럴 것이 내 피부는 모기에게 물린 상처와 흉터로 누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얼룩덜룩 하였고, 한때 어머니의 소망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가진 적도 있었던 나의 양 손가락은 뼈마디가 굵어져서 상대적으로 길이가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착시를 일으켰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군대에 아들을 보낸 가정이 경험할 수 있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장면일 텐데, 첫 휴가를 나온 나에게 흐느낌에 이어서 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운명의 연좌제도 아니고 당시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던 위 말씀을 요사이 다시 곱씹어 보자면, 나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는 공군 훈련병들에게는 ‘지옥에서 온 사자(使者)’ 그 자체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을 위해 밖에서 힘들게 일하시며 지금까지 인생을 이끌어오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나아가 우리 소중한 가족은 과연 대외적으로도 그 본질이 선(善)과 사랑일까? 아니면 생각만 해도 애틋함이 밀려오는 감정과 함께 이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상대적인 것인가?
만약 ‘우리 가족은 언제나 옳고, 사랑이야. 틀림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의표를 찌르는 영화를 한 편 소개하고 싶다. 2023년에 개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이렇게 완벽한 집이 또 있을까요?” 라는 반어의 영화 포스터를 기치로 내세운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4)'라는 영화와 동일한 소재를 가지고 다른 레시피(Recipe)로 조리하였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여느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달리 가해자의 시각에서 영화가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 때는 1943년,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는 아내와 다섯 자녀와 함께 수용소 옆에서 살고 있다. 회스는 자녀들과 집 마당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낚시도 하며 여가를 보내고, 그의 아내는 아끼는 정원을 정성스레 가꾸며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독일 상류층으로 보이는 한 가정의 평범한 일상을 건조한 시선으로 연출하는 반면 마당의 벽을 기준으로 하여 집 울타리 밖에서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총소리, 비명소리 등 불길하고 참혹한 음향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음향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의 대조적인 입장을 바라보면서 관객들이 느끼게 되는 위화감을 더욱 증폭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회스는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온순하고 여린 사람으로 묘사된다. 두 딸이 잠이 들 때까지 침대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자상하게 읽어주는 아빠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철저하게 위장신분으로 살아가다가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에게 발각되어 1962년에 교수형을 당한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은 ‘악의 평범성’을 여실히 잘 보여준다.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의 총 책임자였다면, 아이히만은 학살을 집행하는 실무자에 해당했는데 체포된 아이히만의 모습이 옆집 아저씨의 외모와 같이 너무나 평범했던 것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적이 있다.
이러한 ‘악의 평범성’은 비단 역사적 사건인 홀로코스트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나 자신과 우리 가족은 피해자가 되면 되었지 가해자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고,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며, 전혀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루돌프 회스처럼 유년 시절 다정한 손길로 밤마다 잠든 나를 쓰다듬어주며 사랑해주셨던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언제나 희생하시는 분이지 남에게 비수를 날리거나 남을 밤에 잠 못이루게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애지중지 키웠던 나의 자식은 결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질이 나쁜 친구의 꾀임에 넘어가거나 어린 시절 약간의 결핍으로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이 나왔을 것이라며 객관화에 실패하는 우리들은 언제나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경우가 없는 것이며 그들이 무언가 온전치 않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를 비단 개인과 가정에만 국한하지 않고,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해보자면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뿐만 아니라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게 된다. 본질이 선한 것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 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는 각자 판단할 몫이겠으나 대부분 침략을 당하기만 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베트남 전쟁으로의 파병 가운데 자행된 일부 한국군의 만행은 우리도 영화의 주인공 회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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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티큘러(lenticular)는 우리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입체감이 달라지는, 주로 광고에 사용되는 인쇄물이다. 우리가 이 렌티큘러의 시각을 고수한다면, 내가 나 자신과 나의 가정, 공동체, 나아가 국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과 타인이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특별한 의도 없는 내가 사실 ‘악’에 해당할 수 있음을, 그리고 악은 우리들과 같이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역발상으로 보여준 수작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로서 약 100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처형한 루돌프 회스(1901-1947)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1947년 자신이 근무했던 사무실을 바라보면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렌티큘러가 깨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