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현자도 한때는 날라리였다

by 김이밤

도파민 중독자에서 성자가 되기까지


고등학교 시절, 인간이라기보단 '직립 보행하는 도파민'에 가까웠던 친구 한 명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본능에 충실했고, 대놓고 말하면 뇌를 거치지 않고 행동하는 녀석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졸리면 책상에 침을 흘리며 잤고, 축구가 하고 싶으면 야자를 째고 운동장으로 뛰어갔으며, 연애하고 싶으면 옆 학교까지 찾아가 기어이 커플이 되곤 했다. 화가 나면 주먹부터 나갔고, 기분 좋으면 복도 끝에서 끝까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마치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을 도장 깨기 하듯이, 각 단계를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그야말로 자아는 없고 본능만 존재하는 생명체 같았다.


그랬던 그 친구와 얼마 전 여의도의 한 고깃집에서 재회했다. 놀랍게도 녀석은 현재 제1금융권 은행원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쉬는 날에는 성당에 간다고 한다.


말끔한 슈트를 입고 고기를 뒤집으며 "요즘 금리가 말이야..."라고 나직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과거 학교에서 빵을 입에 물고 뛰어다니던 짐승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와, 너 예전엔 진짜 미친놈 같았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냐?”


내 질문에 녀석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글쎄, 그냥 해볼 건 다 해봐서 그런가. 딱히 이젠 막 끌리는 게 없네. 조용한 게 좋아."


그 순간 나는 그에게서 묘한 성스러움(?)마저 느꼈다. 그는 단순히 철이 든 게 아니라, 본능이라는 폭풍우를 온몸으로 통과한 뒤 고요한 바다에 도착한 선장처럼 보였다.




성인(聖人)들의 흑역사와 모범생의 비극


우리는 흔히 '현자'나 '성인'을 떠올릴 때, 태어날 때부터 세속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먼 '모태 금욕주의자'일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는 이들의 과거를 들춰보면, 의외로 '쾌락의 끝'을 달렸던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꼽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젊은 시절 사생아를 낳을 만큼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오죽하면 회심하기 전 그가 남긴 기도가 "주여, 저에게 정결과 절제를 주시옵소서. 하지만 아직은 마시옵소서(Not yet)!"였겠는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역시 말년에는 금욕과 무소유를 실천한 성자였지만, 청년 시절 그는 도박에 빠져 집을 날릴 뻔하고 술과 여자 없이는 못 살던 난봉꾼이었다.


이들과 내 친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나는 그들이 젊은 시절, 자신의 욕망을 억지로 억누르지 않고, 지독할 정도로 충족시켜 보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강요한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음식 생각으로 도배될 뿐이다. 음식 생각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보는 것이다. '물린다' 싶을 정도의 포만감에 도달해야 비로소 숟가락을 내려놓고 쿨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그들은 '참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졸업한 것'이다.


최근 심심찮게 들려오는 '엘리트들의 일탈'이나 '어른들의 뒤늦은 사춘기' 현상도 어쩌면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유독 '조숙함'을 강요한다. 학생 때는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어"라며 욕구를 유예시키고, 취업 준비생 때는 "취직하고 나서 해"라며 인내를 강요한다. 그렇게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이들은, 정작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올랐을 때 내면에 억눌려왔던 욕망이 기형적으로 폭발하곤 한다.


멀쩡한 전문직 종사자가 기이한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평생 착실했던 가장이 늦바람이 들어 가정을 파탄 내는 뉴스를 보라. 그들은 욕망이 없는 게 아니라, 욕망을 '해소'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끓어오르는 압력밥솥의 김을 제때 빼주지 않으니, 결국 뚜껑이 날아가는 폭발 사고가 일어나는 셈이다. 반면, 학창 시절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녔던 내 친구는 오히려 일찍 김을 뺐기에, 가장 에너지가 넘쳐야 할 시기에 누구보다 차분하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있다. 이를 보면 인생에는 '욕망 총량의 법칙'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일찍 쓰느냐, 나중에 복리이자와 함께 폭탄으로 맞느냐의 차이일 뿐.





파도를 끝까지 타보는 삶


물론 이것이 내일 당장 전 재산을 털어 유흥을 즐기거나 범죄를 저지르라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방종과, 경험으로서의 욕망 추구는 구분해야 한다. 다만, 나는 우리 사회가 개인의 욕망을 너무 죄악시하거나 무조건적인 억압만을 '미덕'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으면 복이 온다"는 옛말은 어느 정도 수정되어야 한다. 무작정 참으면 복이 오는 게 아니라, '병'이 온다. 건강한 사회란 구성원들이 자신의 욕구를 안전하게,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해소할 수 있도록 용인해 주는 사회다. 그리고 개인은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 적정한 수준의 해소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내 안의 욕망을 너무 미워하거나 억지로 가두지 말자고. 가끔은 다이어트 중이라도 가장 칼로리 높은 음식을 먹어보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도 하루쯤은 폐인처럼 놀아보자. 인생에 치명타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안전한 파산'과 '건전한 일탈'을 허락하자.


진정한 어른은 욕망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파도를 끝까지 타보고 나서야 비로소 모래사장으로 걸어 나온 사람일 테니까. 나도 먼 훗날 "그거 해봐서 아는데, 별거 아니더라"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경험치 만렙의 '경력직 현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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