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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ul 21. 2019

재즈바, 기억의 아카이브

모든 기억의 층은 재현되었다.

약 한 달만에 다시 만나는 B언니는 내게 무얼 할까 물었고 나는 한강에 가고 싶다 했다. 곧 언니 다리가 평소와 같지 않다는 걸 떠올렸고 나는 많이 걷지 않는 장소가 어디일까 고민했다. 문득 라이브 연주가 있는 술집이면 좋을 거라 생각했고 괜찮은 재즈바가 있었으면 싶었다. 마침 적당한 장소에 꽤 괜찮을 것 같은 재즈바를 찾아냈다.


비가 그친 아주 습한 금요일 아직 이른 저녁 8시 골목을 되돌아 재즈바를 발견했다. 지하로 내려가니 아담한 공간의 네 개의 테이블이 놓여있고 바텐더 맞은편 예의 그 긴 테이블이 자리했다.  그 재즈바는 예상과 달리 밝은 노란빛의 조명이 가득했고 무언가 가정집처럼 포근한 분위기가 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곳이 아무도 없이 완전히 비어있었기에 어딘가 잘못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였으면 분명 나갔을지도 모르다. 


곧 주인아주머니로 보이는 분과 바텐더처럼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아가씨가 적당히 친절하게 우릴 맞이했다. 나는 그제야 찬찬히 바를 둘러보며 이곳이 은근히 귀여운 인테리어 소품들로 꾸며져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메뉴판을 정독하고 언니가 추천해준 '스크류 드라이버'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두 잔 시키고 오븐에 구운 방울토마토도 주문했다. 매우 자연스러운 어조로 당연하다는 듯이 바텐더는 "독하게 타드려요?"하고 물었다. 


건대에 이렇게 조용한 곳이 있다니. 들어올 때도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던 음악의 볼륨은 반이 되었다. 그곳에 손님은 둘 뿐이었고 우리를 위한 배려였는지 재즈바가 무색하게 음악 소리는 아주 잔잔했다. 덕분에 카페에 있을 때보다 더욱더 심도 있는 대화가 가능했다. 


언니는 내게 '왜 재즈바에 오고 싶었어?'라고 물었고 나는 '그냥 연주가 듣고 싶었어.'라고 대답했다. 나는 '재즈 좋아해?'라고 되물었고 '잘 모르지만 좋아해.'라는 답을 듣자 '나도'라고 말했다.


우리 테이블 바로 앞에는 악기가 장식품처럼 놓여 있었다. 오후 10시, 이제 10분 후면 공연이 시작되겠지만 여전히 손님이라곤 우리와 주인과 매우 친해 보이는 쉴 새 없이 떠드는 긴 머리의 남자뿐이었다. 곧 4~5명의 이질감 없이 어딘가 친숙한 음악가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손님이 없단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익숙하게 악기를 세팅했다. 주인은 머쓱한 지 아마도 사람들이 휴가를 떠난 것 같다고 말했다. 


진지하게 입술을 앙다물고 있던 키보드를 치며 손목을 풀던 남자는 옆에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에 핸드폰을 올려두었고 나머지 세션에게 '웃자'라고 말했다. 비디오 녹화 버튼을 누르고 그렇게 재즈 공연은 시작되었다. 


어릴 적 피아노를 칠 때는 왜 몰랐을까? 연주를 눈 앞에서 듣게 되면 음악이 심장에 바로 꽂힌다는 사실을. 귀와 머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몸으로 곧장 선율이 느껴진단 사실을. 그건 확실히 이어폰이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보다는 호소력 있고 충동적으로 느껴졌다. 재즈는 어딘가 세련되었고 깔끔하지만 변칙적이고 유머러스하다. 그래서 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몰라도 재밌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감정이라도 리듬감을 놓치지 않는다. 잔잔한 하모니를 시작으로 온몸이 들썩거릴 만큼 신나는 연주가 순식간에 이어졌다. 


이상했다. 완전히 음악에 몰입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순간 재즈를 듣던 모든 기억의 아카이브를 활짝 열어 꺼내보기 시작했다. 지금에 있으나 지금에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 다른 연주 곡, 다른 공간, 다른 시간, 다른 악기가 분명한데도 재즈 선율이 들려오자 재즈를 듣고 있던 나의 모든 기억과 감정의 아카이브는 툭 튀어나왔다. 


쿠바 아바나 고급스러운 재즈바가 생각났다. 그루브 넘치던 연주곡과 트럼펫, 허스키하고 강렬했던 여성 보컬의 음색과 섹시한 몸짓이 생각났다. 나보다 한 살 어린 H는 자신이 재즈를 엄청 좋아한다며 여기가 좋아서 연속 5일째 오고 있다고 말하며 앉은 채로 춤을 췄었다. 밤새 말레콘을 걸으며 하던 대화가 생각났다. 


송곳이 생각나버렸다. P는 어느 날 내게 고백했다. 사실 자신이 하고 싶은 건 음악이라고 그 마음을 억누르려고 숨기고 숨기려고 감춰두었는데 자꾸 주머니에서 삐져나오는 송곳처럼 그 사실이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P는 노래를 잘했다. 베이스를 치고 중창단에서 활동했다. 일렉기타를 쳤다. 나는 어쩌면 P가 어느 바에서 오늘 공연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1년 전 갑자기 가게 된 재즈 페스티벌이 떠올랐다. 돗자리도 없어 불쌍하게 신문을 깔고 쭈그려 앉아있었다. 나는 흥에 겨워 몸을 들썩이다가 결국 마지막 차례로 웅산 님이 나오자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홀로 춤을 췄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면 배가 터지도록 웃고 싶어 졌고 세상이 너무 즐겁게 느껴지곤 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 혹은 무언가가 취향이다라는 말은 그것과 연결된 기억의 아카이브를 층층이 쌓아두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인상 깊고 강렬한 그리고 대부분 긍정적인 감정으로 점철된 순간의 기억은 나도 모르게 서로 느슨하고 희미한 교신을 주고받는다. 평소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듯이 여기저기 널려있다가 테마가 던져지면 순서를 정해둔 듯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서로를 소환하며 다시 한번 순식간에 재 경험되는 것이다.


그 순간에 나는 재즈를 듣고 있었지만 그 재즈만을 듣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래서 재즈가 좋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경험은 경험의 총합이 되어버리고 마는 거다. 문득 나는 고개를 들어 다음 재즈를 들을 때면 그날의 기억 또한 아카이브에 저장되어 플레이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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