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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ug 01. 2019

애어른의 탄생

진지하지 않다고 대충 사는 건 아니야

애어른의 탄생


실없는 농담을 쓰윽 던져도 진지하게 들리는 사람이 있다. 매사에 진지해 보이고 깊이 고뇌하고 어쩐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은 우수에 찬 눈빛에 젖어있는 사람. 농도 깊은 진지함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도 어린 시절 그는 이미 애어른으로서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지만 성숙하다던가 동생이지만 맏이로 오해받고 한다든가. 애어른은 어쩌다 탄생하는가? 아마 그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던가 부모님이 철이 없었다던가 맞벌이 가정, 낯선 환경 등등. 아이로서 마냥 아이답게 어리광 부리며 지낼 시간이 적었기에 생존의 한 방식으로서 애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에게 '아이고 아이가 참 의젓하네'라는 칭찬을 받는 순간 애어른의 캐릭터는 고착화되고 곧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나는 좀 성숙한 아이구나.' 가끔 그 사실이 뿌듯해지기도 한다. 



진지하지 않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애어른은 늘 걱정한다.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위험하고 불확실한 온갖 걱정거리들에 대비하기 위해 선수학습을 한다. 어쩌면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 내가 저지르지 않았지만 감내해야 했을 고난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기에 최대한 많은 변수를 통제화에 두고 싶다. 애어른은 겸손하다.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가치, 자신이 이룩한 성취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한 단점과 미래에 문제를 일으킬 속성이 다분한 아직 자신이 갖추지 못했던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온갖 걱정할 거리가 끝도 없이 밀려 대기표를 끊고 있다. 생각만 해도 하루가 이렇게 잘 가는데. 이렇게 복잡하고 심오한 게 인생이다. 잠시나마 정신줄 놓고 해맑게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고 있다는 건 죄악이다. 베짱이의 말로란 얼마나 비참했는가? 적어도 애어른의 책임감을 발휘해 개미처럼 최선을 다해야 미래의 문제가 발생하면 조금쯤 견딜 마음이 생긴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들고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한심해한다. (물론 티는 내지 않지만) 인생 최대의 고민이 기껏해야 점심메뉴가 무엇인지 혹은 아까 가위바위보로 손목 때리기 내기에서 져서 매우 분하다든지 종류의 고민을 하는 발랄한 청춘들이 답 없이 느껴진다.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분수에서 어떻게 하면 수영을 쳐도 경비 아저씨한테 혼나지 않을 수 있을지 몇 시에 담을 넣어야 학주한테 안 걸리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들이 걱정된다. 아니 저렇게 살아도 괜찮나? 저렇게 살아도 미래가 있나?


애어른은 매사에 전력 질주한다. 모든 의무에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진다. 자신의 삶에 조금의 가벼움도 허용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인생은 심각하고 중요하고 진지하니까.


가벼워지고 싶어도 가벼워질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도 애어른 역시 자신의 결점을 맞닥뜨린다. 바보가 되어버리고 마는 순간. 그렇다. 그 생각 없이 사는 멍청이들만 바보인 줄 알았는데 애써 열심히 살았던 나도 사실은 바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영구 흉내라도 내며 세상 제가 바보랍니당~ 재간이라도 부리면 좋을 것을. 애어른에게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다. 인정할 수 없는 자존심의 스크래치. 빨리 덮어버리고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는 꼬리표 같은 인생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바보가 아니란 걸 증명해야 해.


어느 순간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어깨는 이미 굳었고 힘을 빼고 싶어도 근육이 뭉쳐 단단하다. 가볍게 내려놓고 어릿광대처럼 춤이나 신명 나게 한 판 추고 싶은데. 작은 어깨춤조차 어색해져 버린 것이다. 작은 문제도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그건 끊임없이 내가 바보라고 말해주고 열심히 심각하게 살아온 자신의 방식이 더 바보처럼 느껴지니 자괴감마저 느껴진다. 그럼에도 내려놓고 가벼워질 수 없다. 어깨에 더한 짐을 메야한다. 그게 내 인생을 책임지는 나의 확실한 방식이니까. 너무 힘들지만 내려놓을 수가 없다. 인생을 잘 사는 것 같지 않아서.



사실 우린 한 명도 빠짐없이 바보이다.


최근에 알아낸 고급 기밀 정보인데 (두둥!) 사실 우리 모두 다 바보다.  기사 자격증 있는 바보, 40년 장인 정신 발휘하는 바보, 박사 학위 있는 바보, 좋아하는 일 하는 바보, 연애 때문에 고민인 바보, 존버 하는 바보, 애어른 바보, 예쁜 바보, 몸좋은 바보, 패션센스 죽이는 바보, 그냥 바보. 뭐 종류는 다양하다. 나만 바보일까 두려웠는데 사실 모조리 바보였다. 기본값이 바보니까 애쓸 필요 없었다. 바보라고 놀림당하는 걸 억울해하거나 자존심 상해할 필요도 없었다. 누굴 바보라고 놀리거나 얕잡아 보는 건 상식 밖의 일이다. 우리는 1년 아니 2주 뒤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가장 나쁜 일이기도 하고 저런 걸 왜 나에게 주는 거야 증오하던 일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되기도 하다.


그러니 바보 주제에 미리부터 무언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걱정해봤자 통제가 안 된다. 해결도 안 된다. 바보니까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 된다. 하다가 잘 안돼도 괜찮다. 우린 원래 바보니까. 문제도 생기고 고난도 생길 거다. 짐짓 억울하기도 하고 예견할 수 있었던 문제를 맞닥뜨린 것처럼 느껴져 자책하기도 하다. 우리들은 모두 미래가 두렵다. 그게 다 바보라서 그렇다. 바보라서 어차피 아무것도 몰랐을 거다. 바보는 그냥 힘 빼고 즐겁게 웃으면서 자신의 영역에서 할 일을 하면 된다. 


그러니까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보단 차라리 아재 개그를 궁리하자. 난센스 퀴즈나 만들고 드립이나 더 치자. 한 명이라도 웃게 한다면 그거만큼 오늘 하루 값진 일은 없다. 바보 아닌 척 애쓰지 말고. 열심히 사는 척 그만하자.


진지하지 않다고 해서 인생을 대충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가볍다고 해서 책임 회피하는 건 아니더라. 어차피 세상엔 무거운 일 가득하고 진지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 진지하게 만드는 사건이 빵빵 터지니. 그냥 혼자 있을 땐 애어른인 걸 포기하고 바보가 되자. 그 편이 훨씬 즐겁고 충실한 하루를 살아가게 만들어 준다.




P.S 고민하지 마요. 어차피 고민해봤자 답도 없는 문제 고민 중이잖아요? 해결할 수 있는 문제면 그냥 행동하면 돼요. 그리고 그 문제 안 생길 가능성이 80%가 넘을 게 분명합니다. 미래는 다른 고민 하고 있을 걸요. 그러니 고민하지 말고 같이 실없는 소리나 하며 낄낄됩시다!  -30년 넘게 애어른으로 살았던 바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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