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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Dec 09. 2019

처음, 너의 키가 작아 너무 좋았어.

열등감이 없는 사람의 매력은 출구가 없다.


 남편과 가끔씩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다가 문득 눈이 마주치고 별 도움도 안 될 해묵은 이야기를 깊고 길게 늘어뜨리는 밤들이 있다. 나는 갑자기 우리의 첫 키스가 생각나? 물었고 그도 기억했다. 오늘도 우린 처음 만났던 그때를 회상하며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사실 처음 너를 보고 네가 키가 작아서 좀 놀랐어. 왜냐하면 널 만나기 전까지 너는 키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거든. 보통 키가 작으면 괜히 미리 언질을 주고 싶어 지잖아. 그런데 처음 본 네가 키가 작아 너무 좋았어. 넌 키에 대해 별 상관 안 한다는 뜻이잖아. 

네가 10cm만 더 컸어도 날 만나기 전 이미 어떤 여자와 결혼했을지도 몰라. 아니, 넌 분명 인기쟁이였을 거야. 얼마나 다행이야. 다른 사람들이 네가 얼마나 멋지고 다정한 사람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아 준 덕분에 내가 너를 만났잖아. 고마워, 20살 초반에 패션 테러리스트 해 줘서.


그는 역시 또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웅 엄청. 내 생각에 키 큰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키에 대한 열등감이 없기 때문이야. 사실은 키가 작다는 객관적인 수치보다도 키가 작다는 열등감이 버거운 거 아닐까. 진짜로 상대가 키가 작아도 아무 상관없지만 그런 나 역시 키에 열등감이 있는 남자라면 만날 자신 없거든.


그러니까 얼마나 대단한 일이야. 키가 작아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는 진짜 멋있어. 너는 어떻게 노력하지 않아도 만족하는 삶이 그리 쉬울까. 너를 자연스럽고 한결같이 좋아할까. 나는 그런 네가 참 좋았어.





 얼마 전 보고 싶었던 영화 'I feel pretty'를 보았다. I am pretty가 아닌 I 'feel' pretty. 주인공 '르네'는 외모에 열등감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실제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자신의 외모를 단지 그녀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달라지는 것 만으로 그녀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수 있는지 영화는 설득력 있게 그린다. 특히 풍만한 몸매로 비키니 선발대회에서 일행의 만류에도 당당히 노출한 채 무대에 등장하는 장면은 최고다. 처음 그녀를 보고 냉소적인 시선만 보내던 관객들의 침묵은 그녀의 센스와 자신감을 본 후, 열광적인 휘파람과 갈채로 바뀌어 버린다.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던 그녀의 투머치 행태를 보다 보면 어느덧 저게 저 세상 텐션의 매력이지 그녀에게 빠져들어 함께 기립박수를 치고 만다. 갖고 싶다. 저런 사람, 저런 태도, 저런 자신감!


 감각은 객관적으로 입력되지 않는다. 뇌를 거쳐 감정이 입혀져 의견과 판단을 만든 이후에야 비로소 지각이 된다. 주관적 사실이 얼마나 상대적인지 우리는 자주 쉽게 잊고 자신의 생각의 틀에 갇혀버리기 쉽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나라는 이미지는 객관적 사실처럼 나의 세계를 장악해 버린다. 내가 어떻다고 느낀 순간 외부 조건과 상관없이 나는 그 감정과 바로 동기화가 되어 버린다.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지각하는지 가장 빨리 눈치를 채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이 연인이다. 다른 이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 숨겨둘 수 있었던 열등감 녀석이 가장 사랑받고 싶은 사람 앞에서는 무심결에 예고 없이 튀어나오곤 하는 거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지점을 언제나 들키고 만다. 나에 대해 불만족스럽고 없애버리고 싶은 무엇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여지없이 부각된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 열등감 그대로 지각되어버린다.


나는 이제까지 소개팅을 해본 적 없다. 사실 소개팅이 두려웠다. 그래서 누군가가 소개팅할래?라고 물어보면 극구 사양을 했다. 남자들은 기승전 예쁜 여자를 좋아할 거고 그게 나는 아니다. 가상의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는 언제나 나의 첫인상을 보고 실망했다. 누군가의 기대를 허물고 싶지 않았다. 단번에 반하게 만드는 데 자신 없었다. 어릴 적 내가 못생겼다는 말을 너무 오래 듣고 자라서 내가 그렇게 못난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예쁘지 않다고 굳게 믿었다. 또한 꾸미는 데 영 소질이 없었다. 주로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화장 안 한 민낯으로 털털함이 컨셉인 척했다. 내가 꾸며봤자 얼마나 예쁘다고 남사스럽게 그러지 말자.
(다만 나를 알게 되면 내 외모와 상관없이 나를 예쁘게 봐주거나 내 매력을 알아줄 누군가가 생길 거야라는 믿음이 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게 없었으면 나는 연애를 못했겠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소개팅 속 내가 그토록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가상의 그들은 다 어디에 존재했을까? 그 실체 없는 두려움의 망상은 내가 만든 나의 세계에 있었다. 내가 만든 '못생겼다고 느껴지는'나의 세계에 말이다. 나를 상처 주고 상처 입히는 건 타인이 아니라 뻔하디 뻔한 나 자신이었다.



 멋진 오빠를 기억한다. 대학교 때 외부 동아리 활동을 하며 만났던 나보다 한 살 많은 오빠, 키가 거의 나만했고(나 역시 작은 키) 몸도 통통하고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겉모습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연애 상대가 아니기도 했지만, 한 두 달이 지나고 그 오빠의 유머 감각과 사람 좋은 경쾌한 웃음소리, 사투리 섞인 정감 있는 음성과 다른 사람을 조용히 챙겨주는 배려심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 자체가 따뜻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오빠는 내 세계에서 '외모가 끌리지 않는 남자'가 아니라 '만나보고 싶은 매력 터지는 남자'로 분류되었다. (좋은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미 임자가 있었다) 그 오빠가 만약 자신의 외모에 주눅이 든 남자였다면, 말 끝마다 자신의 외모를 한탄하는 바보였다면 절대로 그 오빠의 매력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또한 문화적, 시대적으로 선호하는 외모, 이미지, 성격이 없다고 부정하는 건 아니다. 분명 만인의 호감을 얻기 유리한 특정 조건이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고 많은 사람들은 그 외모를 갖고 싶어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그 과정에서 그 편협하고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누군가를 판단하고 판단되어지는 일 또한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만다. 실은 르네처럼 누군가에게 확인받을 필요 없다. 당신이 얼마나 괜찮고 멋지고 매력 터지는 사람인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그 자체로도 얼마나 생명력이 빛나는 사람인지. 당신이 설득할 사람은 딱 한 사람 당신 자신뿐이다. 술 취한 사람에게 나와 상관도 없는 익명의 아무개들에게 당신을 확인받을 필요가 없다.


키가 작아도 가슴이 작아도 코가 오똑하지 않아도 다리가 길지 않아도 턱선이 뭉뚝해도 발이 못생겼어도 굳이 부정하거나 아파하거나 원망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전혀 걸리는 거 없는 부차적 옵션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 진심으로 내가 누가 봐도 홀딱 반할 미모를 갖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한 적이 있다. 너무 예뻐서 외모만으로 누군가를 매혹시켰다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대시를 하게 될 테고, 그중에 진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을 가려내기가 얼마나 피곤했을지 아찔함마저 느껴졌다. 내가 좋아 누가 다가온다면 피곤하게 상대방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 없이 그 사람을 알아가면 그만이었기에 복잡할 게 없었다.


그러니 혹시 예전의 나처럼 사회적 시선으로 형성된 열등감이 걱정된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게 당신의 연애를 더 단순하게 만들어 줄 거다. 반드시 그런 사회적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멋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세상의 관념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람의 매력이란 정말 출구가 없다. 당신이 느끼는 당신 세계의 당신 모습만으로 사람들은 설득당하고 마찬가지로 당신을 느낀다. 예전 그 오빠를 바라보던 나처럼 주변의 누군가가 이미 당신을 짝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에 대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 대한 감정의 문제였어요.
    -영화 I feel pretty, 르네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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