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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Dec 06. 2019

당신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역할연기는 그만둡시다, 우리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임마누엘 칸트, 두 번째 정언명령


 최근 들어 새삼스럽게 놀란다. 오랜 시간 고통받고 많은 경험을 통해 간신히 깨닫게 된 빛나는 교훈들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잘 정리되어 있었다는 허무하고 아름다운 발견에, 내가 알고 싶었던 삶의 철학이나 가치관은 이미 선대에 쓰였고 이토록 가까이서 존재하고 있었다니, 철학 시간 글을 읽고 윤리 문제를 풀었을지언정 부끄럽게도 그들의 가르침은 한 글자도 읽히지 않았다. 너무 흔하고 식상해서 흘러 보냈던 그들의 말에는 군더더기 없는 엄청난 지혜가 담겨있다는 걸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되었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수단으로 대하는 마음에 애정을 쉽게 배제해버리고 마는 걸까. 이해관계가 결부되지 않았어도 악의 없이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타인을, 아니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을 그 자체로 바라보지 못할 때가 참 많다. 심지어 그 사실을 한 번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다.




 신입생 시절, 동아리에서 같은 신입생이었던 A를 만났다. 나와 달리 체격도 좋고 잘생긴 A의 첫인상은 어딘가 좀 노는 아이일 것 같았다. 그래서 A의 분류표는 일찌감치 정해졌다. '나와 엮일 리 없는 좀 무서운 사람', 딱히 경계할 필요도 관심 가질 이유도 없었다. 어느 날 혼자 영화를 보기 위해 지하철역에 도착했는데 마침 A에게 연락이 왔다. A는 나와 동행을 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A는 나를 불러낸 후, 대뜸 좋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애를 시작했다.


 A는 처음 본 순간부터 내게 관심이 있었다는 의외의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아니, 그 말을 해주는 A가 좋았다. A는 나를 귀엽고 발랄한 여자애로 생각했다. 귀엽고 발랄한데 책도 좀 읽고 나름 개념이 잡힌 반전 매력을 지닌 사랑스러운 여자애. 신입생 시절 풋풋한 연애 상대로 제격이었다.  


 반면, A는 누구나 꿈꾸는 이상형에 가까웠다. 큰 키, 딱 벌어진 어깨, 운동을 좋아하고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히 잘생긴 얼굴, 모공 하나 보이지 않던 매끄러운 피부,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 노래까지 잘했다, 까칠해 보이는데 의외로 다정하고 귀여운 구석. 그때 A의 사진을 본 룸메 언니는 '야! 이런 훈남 아무데서나 못 만나 꽉 잡아라!'라며 감탄을 쏟아냈다. 이런 훈남이 날 좋아해 준다는 벅차오름과 설렘. A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알콩달콩 동아리 행사에 참여했다. 벚꽃축제에 정장을 입고 놀러 갔다. 같이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장을 보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엠티를 가서 내가 다른 남자와 웃고 떠들자 그는 질투를 했고 나는 그가 귀여워 꽉 안았다. 아침 수업이 시작하기 전 숨을 헉헉대며 달려와서는 나를 겨우 1분쯤 안고, 인사만 건넨 후 그대로 자연대 건물까지 뛰어갔다. '뭐하러 힘들게 뛰어오냐, 나중에 만나면 되지?' 나의 멋없는 질문에 그는 '지금 보고 싶으니까 뛰어왔지.'라고 말했다.


 그렇게 풋풋하고 아름다운 연애는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한 달만에 나는 그에게 장렬히 차였다. 나는 A가 생각했던 것처럼 마냥 순수하고 귀엽고 발랄한 여자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엽고 재밌고 발랄한 데이트를 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심각하고 우울해지고 내가 가진 상처를 거침없이 A에게 내비쳤다. 그가 사랑한 이미지와 실제 나의 모습에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고 20살의 A는 당연히 그 이질감을 견디지 못했다. 나는 내가 그저 우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진 거라 오랜 시간 자책했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었다.


 A는 단 한순간도 나를 사랑한 적 없었다. 그는 신입생 시절에 어울리는 상대를 찾았고 그러한 이미지에 맞는 연애를 꿈꿨을 뿐이다. 나 역시 내게 과분해 보였던 A의 이미지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 적 없었다.

 



연애 관계의 초기 단계에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해 주고, 나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 같은 상대방의 관심을 끌고,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에고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나를 연기하고 있으니까 당신도 내가 원하는 당신을 연기해 줘." 이것이 암묵적인 무의식적 합의이다. 그러나 역할 연기는 힘든 일이며, 특히 일단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끝없이 연기를 계속할 수 없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127-128p


 연애에 있어서 내가 저지른 대부분의 많은 실수들은 누군가의 '이미지'를 사랑하고 상대방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해버린 지점에서 연유했다. 무료한 내 삶에 재미를 던져줄 유쾌한 연인, 불안정한 내 삶을 잠시 동안 완전하게 느끼게 해 줄 안정감을 주는 연인, 지적인 욕구를 채워줄 연인 등. 이런 이미지에 갇혀 사랑을 할 때는 나 역시 도의적으로 그가 요구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보잘것없는 내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외국인, 알고 보면 의외로 잘 꾸미고 잘 노는 애인, 귀엽고 발랄한 애인 등. 처음에는 그 사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어서 그 역할연기가 기뻤지만, 곧 그 연기에 지쳐갔다. 흔히 말하는 '권태기'라는 건 이미지 소비에 대한 지겨움 혹은 이미지 연기에 대한 지긋지긋함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른다. 역할 연기는 언젠간 반드시 끝이 난다.


 역할 연기는 서로의 가슴에 큰 구멍을 내기 쉽다. 바라는 사람은 바라는 만큼 채워지지 않아 좌절감이 든다. 속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채워주려던 사람은 자책과 불안에 시달린다. 상대방이 원망스러워진다. 어느 날 마주친 연인의 눈빛에서 이 사람이 나를 그저 바라보고 있지 않구나라고 느꼈을 때 찾아드는 불안과 공허함이란 아무리 그 관계가 잘 굴러간다해도 바로 빠져나오고 싶을 만큼 두렵고 서글픈 감정이다. 역할 연기는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킨다. 함께 할수록 외로움이 커지고 만다.


 이미지를 바라보고 이미지를 찾는 일은 그만 두자. 역할 연기는 사회생활 속에서 지겨울 정도로 하기 싫어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학생과 선생으로, 부모와 자식으로,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동료로, 선배와 후배로 하물며 손님과 점원으로. 누군가 내 인생에 나타나 내 부족한 이미지를 채우고 무언가 결여된 내 삶에 완전성을 가져다 줄 거라는 헛된 기대는 무의식적 요구라해도 경계하는 게 좋다. 그것들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무리 역할 연기를 정교하게 잘한다 해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을 조건부로 환상으로 허상으로 바라보는 누군가를 알아볼 수 있다. 이유를 설명 못하는 싸함과 그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차갑게 잠식하는 헛헛함. 우리는 본능처럼 인지할 수 있다. 누군가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지, 이미지를 찾고 있는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원하는 단 한 가지는 자기 자신 그대로 누군가에게 아무 조건 없이 사랑받는 것이다. 누구도 조건부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지니고 누군가를 알아가고자 할 때, 목적이 없이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어라. 그 사람과 대화할 때는 '좋은 인상을 줘야지, 뭐라고 말해야 이 사람의 반응을 얻을 수 있을까?'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두자. 그 사람을 만나는 그 시간에는 그저 그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되고 당신 앞에 앉은 그 사람을 아무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그렇게 그 사람을 바라보며, 둘 사이에 생기는 애정과 감정, 예측할 수 없는 서사가 사랑이고, 당신이 바라던 진정성 있는 연애다. 아무 편견도 판단도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관계, 그 멋짐을 한 번 경험해 보면 다른 여타의 방식은 모두 거추장스럽고 요란한 장식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굴 만났는가?'보다 자신에게 먼저 던져야  질문은 '누굴 바라보고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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