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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Dec 02. 2019

이별해도 모든 연애는 가치 있다.

한 사람을 이토록 깊이 부딪히는 경험이 주는 선물

 


때로 눈치가 빠르다는 건 저주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항기가 결여된 그만큼 예민함과 자의식이 강했던 사춘기 시절, 엄마 옆자리에 앉아있던 한 남자를 보는 순간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불길하고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예감, 그것은 불안이었다. 이성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고 누굴 열정적으로 좋아해 본 적 없던 미성숙한 나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이나 사랑에 대해서 치열하고 아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순진하고 평범했기에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 놀라울 게 없는 게 인생'이란 사실을 아주 오래 몰랐다. 내 인생은 평범했고 조금의 균열도 생길 리 없다고 믿어왔다. 그렇기에 그 일은 아주 오래 내 마음 깊숙한 무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담백하게 넘길 수 있는 사실에 꽤 충격을 먹었다.


 하나, 꼭 사랑으로 인해 결혼을 하는 건 아니다. 고로 모든 부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

 하나, 자식과 부모 사이가 영원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기도 전에 사랑의 끝을 먼저 봐버렸다. 사랑의 달콤한 부분을 베어 먹기도 전에 쌉싸름하고 비릿한 고통의 맛이 혀끝을 채웠다. 사랑이란 감정의 변덕을 목격하고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차가운 현실과 마주쳤다.


 그로 인해 많이 괴로웠고 불안이란 지병을 만성적으로 달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오히려 '끝'이 분명한 사랑의 유효기간이 나를 안심시켰다. 이 지독한 회의주의적 속성이 순간순간 사랑과 관계에 나를 열중하게 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와 만나면서 이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이 감정이 지속될 것이라 믿어본 적 없다. 내일 당장 그 관계가 변해도 원망하거나 탓할 수가 없었다. 그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오늘 내가 웃고 울적했던 그 횟수만큼 두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 , 지금, 내가 하는 사랑에 후회 없이 모든 걸 다 해봐야 했다. 오해하지 않게 많이 표현하고, 끊임없이 설명하고 먼저 다가갔다. 시작은 두 사람이 동의해야 시작되는 게 연애이지만 어느 하나가 끝내기로 결정하면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맥없이 끝나고 마는 찰나의 순간이 연애니까. 오히려 더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내일이 없는 관계가 연애였다.


 그래서 끝이 두렵지 않았다. 끝이 정해져 있던 사랑도 망설임 없이 시작하곤 했다.




 과거, 연애는 나와 잘 맞는 상대방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의 연애가 끝나면 앞으로 만나게 될 연애 상대에 관한 한 가지 이상의 고려사항이 덧붙여졌다. '정적인 나에게는 동적인 사람이 잘 맞아.', '감정이 안정된 사람을 만날 것.' 등등. 몇 번의 연애가 지나면 분명 자신에게 더 잘 맞는, 좀 더 편안한 상대방을 고르는 안목이 키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애의 의미가 그런 것에 불과하다면 차라리 영화 'Her'처럼 나를 위한 맞춤 인공지능 '사만다'를 발명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의 사랑과 연애의 초기 기억이 되어준 첫사랑에게 늘 감사하다. 세상이 두려웠고 사람을 믿기 어려웠고 나 자신을 몹시 미워해 사랑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던 그 시절 나에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넘치는 애정을 주었다. 아니 슬프고 우울했던 내 마음으로도 사랑을 주는 기적 같은 일이 가능함을 증명해 주었다. 종종 그 아이에게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때 우울증을 앓았고 자주 울었고, 그 아이는 너무 든든하게 내 곁을 지켜주고 살뜰히 보살펴줬기에 일방적으로 그 아이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을 오래 해왔다. 몇 년이 지나고 그 아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흔들리던 시기에 나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신에 대한 의심이 사라졌다고. 퍽퍽했던 삶 속에 내가 작은 위안의 샘이 되어줬다는 걸. 나 또한 그 아이의 인생의 빛이었던 셈이다. 


 이토록 서로를 바라보며 진심을 다하는 관계 안에는 이해득실이나 세상의 논리와 별개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깃들곤 한다. 그 아이가 그저 친구였어도 서로에게 분명 힘을 주긴 했겠지만,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깊이 결부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관계에는 지켜야 할 적당한 거리가 있다. 나를 다 보여주고 누군가를 알고 싶다 해도 우리는 너무 바쁘고 해야 할 일들이 많고 서로를 배려한다면 접근하지 말아야 할 주제들이 있다. 물론 연애를 해도 그건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가깝고 가장 폭넓게 서로에게 허용적인 관계는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독점적 배타적 1:1 방식의 연애 덕분에 다른 관계에서 부딪히기 힘든 구간까지 서로에게 다가가고 관여할 수 있다. 목적이 없이 온전히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바라보고 함께하는 시간을 쌓아간다면, 그것이 또 연애라면, 의도하지 않아도 인생에서 간직할만한 다양한 가치와 고유한 이야기를 서로 써내려 가게 된다.  


 결국 연애는 상대에 대한 사랑을 통해 나 자신을 거울처럼 비춘다. 이전에 미처 몰랐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고 자신의 견딜 수 있는 지점과 견딜 수 없는 지점을 밝힌다. 어떤 상대방을 만났는지와 관계없이 모든 연애를 통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야 만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나와 타인, 나와 세상 아니 나와 나 사이를 조율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연애를 통해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깊이 확인하고 자신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당장 내일 이별이 찾아와도 내 맘 같지 않아 마음이 많이 아파도 서로 상처 내고 상처 받아도 행복한 추억보다 괴로운 추억이 떠올라도 연애가 인생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더라도 연애는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셈이다.


" 너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너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야."
                                                                                   -Mi Cubano, 3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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