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여 그 구독 버튼을 누르지 마오...
이 글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경고장이다.
다시는 넷플릭스의 구독 버튼을 누르지 말지어다.
대학교 때 오빠랑 1년 반 정도 같이 기거하던 적이 있는데 오빠는 그때를 떠올리며 항상 나를 이렇게 묘사했다. "방바닥 폐인"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때 나는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꼼짝하지 않고 화면을 바라보다가 몸이 배겨 아예 누운 자세로 컴퓨터 모니터를 90도로 돌리고 눈만 뜬 시체 상태로 드라마(미드로 추정)를 정주행 하다 오빠한테 딱 걸리고 말았다. 아주 잠시 나 자신조차 부끄러워졌지만 드라마를 멈추지 못했다.
전적으로 넷플릭스 탓을 할 수는 없었다.
집순이 기질 + 가끔 고도로 발현되는 무서운 집중력 + 호기심 +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에 질려하지 않는 인내심 + 이야기를 무척 좋아함 + 과도한 감정이입 + 기억력이 좋지 않음 = 완결된 엄청 재밌는 무언가를 그 자리에서 끝장 내길 좋아함.
플랫폼에 상관없이 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웹툰이든 만화책이든 원래 흥미를 끄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잠시 현생을 잊는 법에 익숙한 DNA를 지니고 있긴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즐겼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몸이 고되거나 정도가 과하다 싶으면 정주행을 멈추고 다음날로 미루는 사람도 있더라. 어쩌면 나는 어마어마하게 도파민에 부여되는 자극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이런 집요한 기질이 두려워 무언가에 중독되는 게 싫었다. (그러나 떡볶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건 실패했다) 중독될 것 같으면 그 자리를 박차고 저 멀리 도망쳐버리기도 했다. 나란 인간은 한 번 중독되면 자기 파괴적 파멸을 맛보기 전까지는 절대 제어할 수 없을 테니까
그 위험한 세계에 다시 발을 들인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1년간 왓챠플레이를 구독했지만 딱히 중독 상태를 보이지 않았기에 제법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요즘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구조가 궁금했다.
거의 1년 만에 Netflix를 재구독했다. 한 달 무료로.
거기다가 멋진 스마트 TV 리모컨에는 Netflix로 직행하는 빨간 버튼 장착! TV의 전원을 누르고 Netflix 버튼만 누르면 무제한으로 영상이 스트리밍 되는 세상이라니.
첫날에는 보고 싶었지만 그동안 미뤄둔 기묘한 이야기 시즌3를 정주행했다. 1,2보다는 중독성이 약하고 스토리도 조금 빈약했지만 그래도 3만의 매력이 있었다. 잠시 호킨스 마을에서 살다 나왔다.
못 봤던 익스플레인 다큐멘터리도 자기 전 한 편씩 보고 내 호기심을 자극했던 tvn 드라마 '로맨스 별책부록'도 정주행했다. 거기까지는 살짝 맛이 가긴 했지만, 여전히 현실감각은 남아있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는 인지하는 상태였고 왓챠를 볼 때와 큰 차이를 느끼지 않았다.
빌어먹을 세상따위(엄청 재밌었다), 빨강머리 앤, 프렌즈, 홈랜드 등등 기억도 안나는 프로그램을 보며 약 2주가 순식간에 지나갔고, 내 삶엔 소파와 넷플릭스밖에 남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나는 더 이상 보고 싶은 작품도 없었지만 무언가를 갈구했다. 리모컨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전원이 꺼지면 나를 덮칠 허무감과 현자 타임이 두려웠다. 확실했다. 나는 넷플릭스 중독 말기 상태였다. 현생을 살아가기 불가능한 정도 내가 다시 정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잔잔한 무언가에 감동을 느끼고 지루한 나날을 견딜 수 있을까? 책을 읽기도 쓰기도 명상도 사색도 성찰도 싫었다. 그 순간의 고민조차 버거웠다. 비이성적인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와 우울감. 넷플릭스 중독자의 말로였다.
그 순간 넷플릭스가 무서워졌다. 아니 감히 넷플릭스를 보며 자각을 잊지 않고 자신으로 현존할 수 있다고 객관적 관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함이 부끄러웠다. 완전한 백기를 든다. 나는 절대 넷플릭스를 이길 수 없다. 현생을 균형 잡히게 살면서 넷플릭스를 즐길 리가 없다. 넷플릭스는 0과 1 버튼만 지니고 있었다. 구독을 하지 않든가 넷플릭스에게 삶을 아예 내어주던가. 장자님이 말한 물아일체가 이런 뜻 일리 없건만.
2주간에 비정상적인 삶을 통해 한 가지 얻은 깨달음은 넷플릭스는 여타의 플랫폼과는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여러 가지에 골고루 중독되어봐서 아는데 그 무엇과도 다르다. 특히, 넷플릭스 오리지널 프로그램은 더욱 위험했다.
일단 표면적으로 찾은 넷플릭스와 왓챠의 다른 점은 선택의 능동성이 적다는 거다.
넷플릭스는 단 한순간도 음소거되는 법이 없었다. 아무 영상을 틀지 않아도 알아서 예고편이 동영상으로 재생되었다. 한 프로그램을 완전히 종료된 후에도 기본 화면이 아니라 무언가의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끊임없는 자극을 주었다. 생각할 틈 없이
내가 왓챠에 매료되었던 점은 추천 알고리즘 프로그램이 꽤나 정교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500편이나 별점 데이터를 입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왓챠 플레이에 있는 모든 작품에 대해 예상 별점을 예측해주었기 때문에 실제로 작품을 보고 난 후의 별점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다. (85% 이상 정확했던 건 소름). 무엇보다도 왓챠에는 다른 사람들의 평점과 코멘트가 바로 보여서 어떤 영화인지(혹은 드라마/쇼프로인지) 보지 않아도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어떤 점에서 재미있고 어떤 점에서 아쉬운지, 그러다 보니 나 역시 인상 깊은 작품을 보면 나름대로 음미하고 여운을 느낄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작품은 전적으로 내가 보고싶은 작품으로 오랫동안 공들여서 고르곤 했다.
처음 하우스 오브 카드에 빠졌을 때는 온전한 쾌감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범상치 않은 주인공과 탄탄한 음모와 특유의 분위기, 게다가 한 시즌의 전편이 한 번에 공개되는 쾌락이 어마어마했다. 후에 하우스 오브 카드가 알고리즘에 의해 제작된 드라마라는 걸 알고서는 꽤나 충격에 빠졌지만 다른 드라마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무언가가 있었다. 몇 안되지만 2주 동안 Netflix의 오리지널 작품을 보면서 느낀 게 있는데 하나같이 이야기 밀도가 높았다. (여담이지만, 힐링할 목적으로 '빨간머리 앤'을 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져 버렸고 차마 시즌2는 재생을 못하겠다.) 잠시도 쉴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시나리오, 감각적인 영상, 나의 마음속 불안과 어둠을 건드는 감정, 현실과 매우 닮아있으나 현실에 대해서 잊게 하는 작품, 매력적인 주인공과 끝없는 자극과 흥미로운 사건의 연속
뭐랄까. 그 모든 이야기가 다 하나인 것만 같았다. "네가 이래도 넷플릭스 왕국을 안 좋아하고 배길래?"라고 폭격처럼 쏟아지는 질문.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나 같은 폐인들을 유혹하기 위한 방책들. 잠시나마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마음에 남는 무언가를 주기 위한 울림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고 그저 더 오랜 시간 구독자를 잡아두기 위해 고도의 잘 짜인 알고리즘의 산물처럼 느껴져 버렸다. 다른 버젼으로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장르로 서로 다른 이야기로 건네지지만 결국은 끊임없이 넷플릭스 지옥에 가둬두기 설계된 치밀한 플랜의 결과물.
넷플릭스 음모론을 품게 될 만큼 나의 삶을 2주간 넷플릭스에 저당 잡혀 있었고 그곳은 지속되는 즐거움과 충만감 없이 자극의 쾌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야기를 보면 볼 수록 마음에 공허감이 가득찼다. 그런데도 끊을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했다. 다시는 넷플릭스에 발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넷플릭스 감옥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현생과의 균형을 잘 잡는 그대가 있다면 그대가 진정 성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