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 Jan 18. 2020

바다에 간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질 때가 있다.

바다 가고 싶다.
-나도

    


 바다에 가기로 했다. 그 말이 나오기 1분 전까지 바다 생각 같은 건 없었는데 동조해 버렸다. 구체적인 예산 계획이나 실행 같은 건 늘 그의 몫이지만 대략적인 방향과 장소는 늘 내가 찾고야 말았다. 가만히 있었다. 찾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가면 좋을지 여러 목적지를 읊다가 세 번째쯤 대부도가 어떠냐고 물었다. 좋지. 고3 때 이후로 가본 적은 없지만(더 이상 무얼 찾기 귀찮으니까)


 대부도에 들어서는 초입구쯤 젖소가 보였다. 터널 위 황량한 야산 위로 젖소 5마리가 건초를 유유히 물어뜯고 있었다. 사람도 없었고 울타리도 길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젖소잖아. 젖소가 왜 저깄지. 아쉽게도 그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다. 나만 본 그 장면을 납득시키기 위해 열심히 설명을 해보았다. 바다를 가다 보면 뜬금없는 흙산의 여유로운 얼굴로 유유히 풀을 뜯는 젖소를 보기도 하는구나.


아무런 계획 없이 가다가 보이는 수목원. 수목원 갈래? 겨울이라 싫어. 젖소라도 뛰놀면 가겠지만.


화물차와 맨홀 뚜껑이 유달리 깊이 파인 도로와 심심찮게 달려있는 속도위반 감시카메라를 지나 공사판을 지나 대부도에 도착했다. 주차장이 폐쇄되어 인근 공사장에 주차를 했다. 그가 좋아하는 풍력발전기가 눈 가까이서 유유히 돌아갔다. 역시 그가 좋아하는 비행기가 낮게 자주 상공을 날았다.




잘 정비된 해안로를 지나 나타난 바다 아니 해수욕장은 난생처음 보는 '포크레인 뷰'였다. 10시가 되기 10분 전쯤 포크레인 뒤를 지나는 검은 패딩을 맞춰 입은 커플이 유유히 산책했다. 해수욕장 한 편에는 바퀴가 아주 크고 높은 트럭 두 대와 이름 모를 흙은 고르게 펴는 지프차 같은 화물차 3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해수욕장은 온통 포크레인 바퀴 자국이 가득했다. 거기다 화룡정점은 밝고 커다랗고 존재감을 뿜어내는 형광 주황 부표, 저거라면 절대 길을 잃지 않겠군. 으음. 망한 것 같은데-


바다를 갔던 수많은 망한 여행을 생각해 본다. 이상하게 바다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무작정 바다에 가고 싶어 지는 나날이 있다. 바다병은 청춘일수록 더 자주 더 깊이 도지기도 한다. 딱 바다를 보고 바닷바람을 맞으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은데 절대 바다를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자각에 괴로워지는 병이라 할 수 있다.


막상 바다에 가는 게 성공해도 망할 이유는 많다. 갑자기 세차게 내리는 비라든지 무지막지하게 불어 조금도 머물고 싶지 않게 만들어주는 거센 바람이라든지 들어오면 크게 혼날 것 같이 많은 갈매기 무리라든지. 엄청난 인파라든지.


아니 모든 조건이 그럴듯해도 사실 막상 바다에 가면 하는 일이란 별 거 없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여름이어도 바다를 헤엄칠 수가 없다. 서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레저를 즐기는 것도 아니며 갯벌에서 조개라도 캐거나 해변에서 조약돌이라도 찾는 법이 없다. 기껏 하는 거라곤 바다를 보고 바다를 조금 걷다가 다시 쳐다보지 않을 사진을 찍고 제법 비싸고 양도 많은데 딱히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는 밥을 먹고 바다 전망이 보이는 예쁜 카페에 앉아 비싸고 맛없는 커피를 홀짝이며 10분 후에는 바다가 보이는 창 따윈 상관없이 이야기를 하거나 멍을 때리는 게 전부다. 그럴 거면 대체 왜 바다를 가는 거냐고.


포크레인을 지나 막상 거의 아무도 없는 해변을 걸으니 실없이 좋아진다. 서해라서 파도가 약하지만 영원히 들릴 파도소리에 마음이 조금 안정된다. 썰물이다. 아직 젖은 해변을 조심조심 걷는다. 멈춰있으면 진흙으로 돌변하니 조심. 하늘이 파랗다. 날씨가 좋다. 거슬리던 부표도 나름의 절취선처럼 또 뭐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백사장을 쭈욱 걷다가 배가 고프다.


이곳의 특산물이 '칼국수'가 아닐까 싶을 만큼 칼국수 집이 엄청 많았다. 칼국수의 천국?.. 적당히 가깝고 평도 괜찮은 칼국수집에 들어갔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 손님은 우리뿐. 맞은편 창으로 주황색 부표가 있는 날씨가 좋은 바다가 보인다. 해물왕창 칼국수라는 식당의 이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푸짐한 해물칼국수가 나왔다. 엄청 맛있었다. 점점 좋아지는 기분. 맛있는 커피를 먹고 싶다고 말하며 검색을 했다. 왠지 다 별로일 것 같단 말이지. 걔 중 왠지 괜찮을 것 같은 모텔을 겸한 커피숍을 찾는다. 차로 20분 거리. 선유도에 있다네.



카페라떼 두 잔과 톰과 제리 치즈케이크를 시켰다. 깨끗한 화장실, 탁 트인 넓은 시야, 역시 아주 많지 않은 인파, 밥 먹을 때도 평소 집에서도 그다지 대화하지 않던 우리는 오랜만에 대화를 했다. 집에서는 고백할 수 없는 멍청하고 사소하지만 지울 수 없는 고민과 생각, 중간에 가벼운 눈물샘을 달래며 치즈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그 고민의 결론은 명확했다. 나는 경험이 하고 싶어.) 음. 맛있어. 정말 이상했던 건 마음이 아주 가벼워졌다. 대화를 하고 나서 각자 책을 읽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오랜만에 실로 마음의 티끌 하나 없이 맑고 행복했다. 무드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삶에 사랑이 가득 찼다. 이유야 여러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역시 슬쩍슬쩍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탁 트인 바다의 영향이 크다.


그 카페가 좋아져 버렸다. 한 달에 한 번씩 이런 곳에 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건 꽤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그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곱씹어 보았는데 글로 적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다음에도 바다를 가게 되면 역시 별 거 하지 않을 게 분명하고 또 어느 날은 망하겠지만 가끔은 바다가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질 때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관계란 시공간의 공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