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다는 게 내게 의미지
맞은편 창을 통해 내리는 눈을 보고 있다. 이번 겨울 이토록 눈이 분명하게 내리는 장면을 지켜본 적 있었던가. 동그랗고 나풀거리는 눈은 바람이 잦아지면 옆으로 이동한다. 가벼워서일까. 위로 올라가는 눈과 옆을 스쳐가는 눈과 바닥에 떨어지는 눈이 한 군데 뒤섞여 어느 방향으로 눈이 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눈이 내린다.'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다. 곧 매서워진 바람 덕에 눈이 가득 찬 풍경이 아닌데도 눈 필터가 사방 군데에 겹친다. 세차게 대각선 방향으로 영원히 그어질 듯한 눈선. 밝고 환한 아파트 옥상 위에 걸려있는 분명히 둥근 해와 점점 굵어지는 선을 보고 있다.
글을 안 쓴 지 한 달이 넘었다. 브런치는 물론 개인적 일기, 편지, 메모조차 쓰지 않았다. 무언가를 많이 읽고 보고 괴로워하고 울다가 잠이 들지 못해 다큐를 보거나 걱정과 불안을 들여앉히고 그를 잊기 위해 중독자처럼 게임에 매진하기도 했다. 며칠 전 우연히 순천에서 만났던 니키의 메시지를 받았다.
'여전히 글을 쓰고 있어?'
'아니. 예전처럼 안돼.'
'쉬어가는 타임 아닐까? 오히려 이런 시간들이 영감을 주기도 하잖아.'
미소를 지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예방 차원에서 외출을 꺼리는 탓도 있지만, 누군가와의 만남이 내키지 않았다. 집에 갇힌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소진하다가 감촉이 느껴지는 이런저런 사물을 만지고 현실과 세계는 뭘까, 현실도피중일까란 생각도 했다. 그러고 나면 머리가 아프거나 가슴 한 편에 묵직한 납덩이가 박힌 것마냥 아프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상상을 했을 때 무소용론이 고개를 쳐들었다. 역시 그렇다.
다만, 어렵게 고백한 요즘의 나의 무기력(이라기보단 무언가 결여되었거나 꺼져가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에 대해 사랑하는 베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 때가 있는 거야. 그럴 때는 기다려야지. 별 수 없지. 그동안 기다렸던 수많은 시간들을 생각해 봐. 그저 내두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먹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작은 거라도 그거 하면 되는 거야. 과거라든가 선택이라든가 그런 거 생각하지 마. 바꿀 수 없다면 생각하지 마. 지금 할 수 있는 것만 고민할 가치가 있더라고.
5년 동안 내 상태도 많이 안 좋았어. 괜찮은 척했지만, 항상 무언가 화가 나 있었고 원망스러웠지. 지금도 완전히 정상이라 할 수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책을 하지도 의무감을 가지지도 마. 뭐든 다 괜찮아. 그러니까 그냥 기다려. ]
지금 막 눈이 그쳐버렸다. 해 또한 도망갔거나 누군가 숨겨버렸다.
베프는 하루가 행복하려면 두 가지가 있으면 된다고 말했었다. '맛있는 음식', '인정' 5년의 시간을 견뎌 낸 그녀의 선택이다.
얼마 전 '과거란 아무 소용없어.'란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K언니 말이었지만 그 말엔 절망과 체념이 깊게 묻어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보다 어른이었다. 훨씬 객관적이고 현실적이며 결코 세상이 미워도 등을 돌리지 않고 굳건히 서있는 사람. 과거에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인정을 받았고 어디를 향해 나아갔고 밝고 예쁜 기억들을 미련처럼 감싸안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고. 무엇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든 그런 건 참조사항이 아니라 지금 그 사회적 지위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척도이자 조건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너도 정신 차리라고,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말이 몇 달이 지나 매일매일 생각이 났었다.
대나무 숲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왜 다르지 않냐고. 왜 그게 아무것도 아니냐고. 결과란 보장되지 않겠지 현실도 변하는 건 없겠지. 지금 쥐고 있는 것이 전부겠지. 그래도 그게 있던 사람과 없던 사람이 어떻게 같냐고. 그 모든 감각, 감정, 생각이 퉁쳐지는 거냐며. 울며 악을 썼다. 마음속으로.
비슷한 말인데 전혀 다른 뜻이 되어 나를 깊이 위로했다. 사회적으로 무가치해 보이는 나에 대한 자책을 멈췄다. 생각을 멈췄다.
곧 봄이 오겠지.
쓰고 싶으면 쓰고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을 거고.
P.S. 정세랑님의 '지구에서 한아뿐'을 사랑하게 되었다. 다시 Anne을 읽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는 완결까지
맘마미아, 그린북, 나는 내일, 어제의 너를 만난다, 최악의 하루,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그리고 드라마 실리콘 밸리를 즐겁게 봤다.
맨프럼 어스, 존 말코비치 되기, 사바하 또한 감명깊게 보았고 컨택트와 라이프 오브 파이를 재관람했다.
작은아씨들을 보러 영화관에 가도 될 지 고민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