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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pr 11. 2020

떡볶이 없는 세상이라니

그러니까 어쩌다 떡볶이를 좋아했더라...


일주일에 두 번씩 떡볶이를 먹었다. 스트레스 받거나 우울할 때 가장 생각나는 음식 중 단연 독보적 1위. 어릴 적엔 주로 떡볶이를 사 먹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주로 떡볶이를 해 먹게 되었다. 크게 취향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편 피셜) 은근히 까다로운 입맛의 나는 떡볶이만큼은 확고하고 선명한 취향이 있다. 내 맘에 쏙 드는 떡볶이 집을 찾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한 입만 먹어봐도 이건 내 타입인데, 이 집에 다시 올까 말까 바로 결정이 가능하다. 너무 맵지도 달지도 않고 MSG 맛이 강하지 않지만 결코 싱거워서도 안되며 이왕이면 양배추가 들어간 쌀떡볶이가 취향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야자 하러 가기 전 들르곤 했던 즉석 떡볶이집, 낙서가 가득한 벽면 구석 속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단무지를 곁들여 먹었다. 중학교 근처 시장에는 떡볶이 집이 줄 지어 있었다. 이쑤시개로 콕콕 집어먹던 떡볶이 한 접시의 즐거움을 천 원으로 누렸다. 사치를 부릴 때면 튀김과 순대도 곁들었지. 직장에 다니면서도 가끔씩 떡볶이를 먹으러 갈 때면 얼마나 설레곤 했던지. 자주 먹어도 또 먹고 싶은 질리지 않는 나의 소울푸드. 


인생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꽤 고민된다. 유력 후보는 엄마표 고추장 수제비이긴 하지만 이건 그 전 날 뭘 먹었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이거 만큼은 안 먹고살 수 없어. 다른 건 다 끊어도 이건 안 돼!' 생각이 절로 드는 건 망설임 없이 떡볶이였다. 내 인생에 떡볶이가 없었다면 이만큼(?) 살아낼 수 없었을 게 확실해. 떡볶이 없는 세상이라 끔찍하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세상이 와버렸다.





이래서 먹방을 보는구나


먹방이라는 말이 유행한 게 4년쯤 되었던가. 난 먹방을 한결같이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걸 왜 보는 거야? 이해의 폭을 넓혀 평소 먹기 어려운 희귀하고 신기한 음식을 먹는다든가, 한 번에 무지 많이 혹은 엄청 매운 걸 잘 먹는 사람까지는 흥미롭다는 차원에서 조금은 이해할 것만 같은데, 단지 맛있게 먹는 먹방을 시간을 들여 의도적으로 보는 심리를 좀처럼 이해하질 못했다. 먹을 거 나오는 프로그램이 지겨워서 채널을 돌리곤 했다. 그런데 요새 나는 가끔씩 먹방을 본다. 아주아주 부러운 마음을 담아. '아 좋겠다. 저렇게 많이 먹을 수 있다니...'


고등학교 때 옆 반 수학 선생님의 충격적인 발언이 소문으로 돌았다. 그 선생님은 천재 같은 이미지로 집에 TV가 없고 꽤나 과묵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지만 가끔씩 뼈 때리는 직언을 잘하셨다. 선생님은 키가 크고 마르셨는데 물욕도 식욕도 의욕도 없이 세상의 즐거움이란 딱히 없어 보이셨다(수학에 대한 열정은 제외) 고등학교 때 얼마나 매점이 붐볐는지 생각해 본다. 쉬는 시간마다 매점은 학생들이 빼곡했다. 그때 우리는 먹고 돌아서면 또다시 배가 고팠고 누군가가 수혈하는 과자를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은 어느 날 여자반 아이들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말씀하셨다. "난 너희들이 정말 부럽다. 먹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런데 그 말투는 결코 비꼬거나 농담이 아닌 오차 없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 말을 개그 카테고리에 집어넣었다. 그건 현실감이 없는 모순적인 개그였다(가진 자의 여유). 오히려 먹고 싶은 게 없는 선생님이 부러웠다.


그런데 요새 먹방을 보며 그들의 튼튼한 위를 부러워하며 진심이 분명했을 선생님의 말을 되새겨 보며 반성하곤 한다. 어리석었다.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먹으라는 그 말의 무게를 너무 가벼이 넘겼어. 위가 더 잘 작동할 때 좀 더 많은 것을 맛있게 먹는 즐거움을 누렸어야 했다. 그 시절이 그리 빨리 가버릴 줄이야. 물론 가끔씩 과식이나 폭식을 하면 탈이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억울하게도 겨우 이거 먹고도 속이 쓰리거나 배가 더부룩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오리란 걸 꿈에도 몰랐다. 나는 많이 먹는 편이었고, 빨리 먹는 편이었고, (프렌즈 로스처럼 늦게 먹으면 다 뺏겨 남는 게 별로 없었다) 편식하지 않는 편이었고 매운 걸 잘 먹었고, 상한 걸 먹고도 혼자 멀쩡했던 건강한 위를 가지고 있었지.




굿바이 떡볶이...


그런데 갑자기 2-3달 전부터 위가 예전만큼 일 해주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주 체하고 아파서 강제 소식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꼭꼭 씹어 밥을 먹어도 이젠 위는 일정량 이상의 음식을 받아주지 않는다. 야식은커녕 저녁에 밥을 1인분 꽉 채워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슬픈 건 고추장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내가 자주 해 먹던 음식엔 거의 고추장이나 고춧가루가 들어갔다. 고추장 때문에 한국에 사는 게 좋을 정도였다. 물냉면보단 비빔냉면을 좋아하고 된장찌개도 좋지만 김치찌개가 더 좋고 수제비도 고추장 수제비를 만들어 먹던 내가... 요새는 들깨칼국수를 먹고 김치 대신 오이피클을 담가먹고 두부조림을 이유식처럼 간장과 설탕으로 두부찌개를 맑게 해 먹는다. 소화 잘 되라고 양배추즙과 매실차도 챙겨 먹는다. 라면도 안녕이다.  혹시나 하고 수프를 반만 넣고 라면을 끓여봤는데 그것조차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내 기억 속 맛있던 그 음식은 더 이상 내 입에 맛있지 않다.


가장 슬픈 건 떡볶이를 먹지 못한다는 거다. 이제 내 인생에 떡볶이는 없는 걸까. 물론 궁중 떡볶이나 짜장 떡볶이 같은 건 먹을 수 있겠지만 그건... 내가 사랑하던 떡볶이와는 많이 다르다.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나 대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맛있게 왕창 먹어주는 사람을 보면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진심으로 부러워하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나이 듦의 증거는 많다. 피곤을 더 빨리 느끼는 저질 체력, 팽팽함을 잃은 피부, 목주름, 빠지지 않는 살...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나이 듦이란 떡볶이를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것. 떡볶이를 포기한다는 것. 이토록 내가 빨리 늙어버릴 줄 몰랐고 나이 듦의 대가가 떡볶이를 앗아가는 것인 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구나. 떡볶이 없는 세상은 너무나 밍밍하고 허전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생각한다.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하아. 떡볶이 먹고 싶다. 돌려줘. 내 떡볶이


P.S. 여전히 떡볶이를 사랑하는 젊은 위장을 가진 분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부디 제 몫까지 많이 먹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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