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만이 새롭고 독특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줄 알았다.
한 번도 소설을 완성해 본 적이 없다.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가장 자주 접하고 열렬히 좋아했던 장르가 '소설'임을 감안하면 다소 의아스럽다. 그러나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되짚어보자면 소설 쓰기란 도전하기조차 망설여질만큼 너무 과하게 멋지고 어려운 일이다.
주로 매료되는 소설에는 늘 매력적인 캐릭터가 존재했다. 마주친 적도 없고 떠올리기 쉬운 정형적인 면모가 없는데도 어쩐지 현실감이 탁월하고 사랑스러워서 그 캐릭터를 떠올리는 순간 정말 그가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생동감을 간직한 캐릭터. 그 캐릭터를 살아 숨 쉬게 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시공간의 구성은 필수다. 일회성이 아닌 사람들이 두고두고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하고 다시 찾는 소설에는 늘 독자적이고 독특하지만 개연성이 탄탄한 세계관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
직접 겪은 일, 직접 보고 듣고 생각했던 글감에 대해서 그대로 쓰는 것과 완전히 새로운 나만의 세계를 설득력 있게 창조해서 흥미로운 서사로 풀어내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 에세이에서는 비슷한 소재의 이야기, 흔한 이야기라도 일상의 고찰이나 공감이란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 다소 관대하게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는 반면, 비슷한 이야기를 별로인 필체로 별 특색도 없는 어설픈 공간에서 써나간다면 그 소설에 대한 의문을 절로 품게 될 것이다. 에세이라면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살아가는 동시성 덕분에 부연설명이 필요 없이 본론만 말해도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존재하지만, 소설은 그 세계와 등장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인내심이 요구되며 몰입하게 되기 직전까지 흡입력이 부족하다면 결코 끝까지 읽힐 수 없다.
에세이보다 소설이 위대하거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목적은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나에겐 소설은 에세이보다 훨씬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 분야로 느껴진다. 조금 더 나아가, 빨간 머리 앤의 주인공 '앤 셜리'처럼 공상을 하고 이야기를 쉽게 만들어내는 능력은 타고나며 그런 사람들만이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 멋진 소설이나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함께 울고 웃고 다시 현실에 나온 나는 그 한 편의 완성된 멋진 세계를 동경하며 사랑에 빠진다. 가끔 마음속 은밀히 이토록 멋진 독특한 세계와 캐릭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건 나 같은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글쓰기 역시 노동이다. 꾸준히 쓰는 게 중요하다. 연습이 중요하다.'라는 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결국엔 아인슈타인의 명언의 진정한 의미는 99%의 노력의 중요성이 아닌 1% 영감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재능 있고 타고난 사람에 한해 노력과 연습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순전히 경험을 가공한, 그리고 자기만족의 목적인 첫 책을 만든 후 고민이 많았다. 나다운 독특한 콘텐츠, 새로운 이야기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도 영감이나 공감이 되는 그런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압박감. 하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압박감으로 탈바꿈해서 결국 쓰던 것조차 쓰지 못하고 그렇게 난 또다시 글쓰기와 멀어지며 이것 역시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일은 아닌 가 봐 지긋지긋한 자기 의심의 덫에 걸렸다. 그러면서도 '나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소재나 콘텐츠 그런 건 대체 어디서 어떻게 오는 걸까?'라는 질문을 늘 품고 있었다.
의외의 실마리는 잠이 오지 않던 새벽 우연히 발견한 공짜 다큐멘터리에 있었다.
J.K. 롤링은 해리 포터를 통해서 현대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의 기반이 상상에 불과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허구인 줄 알고 읽었던 해리 포터의 많은 요소가 실제로 사람들이 믿었거나 과거에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조앤은 익숙한 이 이야기의 가치를 알고, 이를 조합해 자신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해리포터: 마법의 역사, BBC STUDIO
판타지에 관심 없던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책, 완벽히 독자적이고 매력적인 세계관을 창조하는 동시에 현실을 빈틈없이 담아 삶에 대한 통찰력 또한 놓치지 않는 책, 전 세계 사람에게 머글의 개념을 알렸으며 호그와트에 입학해 기숙사 배정을 받고 싶게 만들었던 책, 어마어마한 판매부수와 후속작, 영화까지 성공하고 여전히 많은 팬을 보유한 가장 성공적이고 독특한 이야기를 담은 책, 현실에서 빌려온 게 조금도 없어 보였던 해리포터 시리즈에서도 이전의 이야기를 빌려온 요소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마법사의 돌에 등장하는 니콜라스 플라멜은 실존 인물의 연금술사였으며, 불로장생 약을 찾아 헤매었다. 맨드레이크는 16세기 이탈리아 만드라고라 설화에서 따왔다. 또한 롤링은 컬페퍼의 '약초 도감'에서 이름과 설명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무시무시한 살인 주문 '아바다 케다브라'는 '아바다 카다브라'의 아람어 어원으로 파괴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로마시대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주문으로 쓰였다고 한다. 또한, 조앤 K 롤링은 판타지 소설은 거의 읽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신화나 전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기반이 해리포터에 영향을 주었음을 인터뷰에서 밝힌 적 있다.
이제까지 판타지 소설은 현실의 요소가 결여된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에 모든 걸 의존하여 0부터 1까지 창조해야만 하는 이야기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나를 포함해서 세상에는 창의성과 천재에 대한 오해가 존재했다. 창의적인 사람은 뇌가 다르게 생겼다거나 일반인보다 더 많은 뇌 영역을 활용한다는 믿음, 천재는 한순간에 번뜩이는 영감에서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고 위대한 예술작품을 한 순간에 만들어 내고 말 것 같은 환상.
JTBC '차이나는클라쓰', '우리가 몰랐던 천재 이야기'편을 보면 얼마나 우리가 천재들에게 인상적인 이야기를 원하는지 알 수 있다. 과학 철학자 이상욱 교수님은 '아인슈타인은 낙제생이 아니라 이과 과목에서는 최고점을 받던 똑똑한 학생이었고, 뉴턴이 사과나무를 보며 상대성 이론을 생각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선대의 훌륭한 이론들을 공부했고 함께 토론할 동료들이 있었고,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치열한 연구 끝에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새로운 통찰력을 발휘해서 천재적인 업적을 세운 것이라고.
새로움과 창의성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신비한 마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재능만으로도 오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단련한 후에야, 그 안의 연결고리를 찾거나 그것들을 새롭게 조합할 자신만의 통찰력을 발견하는 것에 가까운 훈련이다.
그러니 하찮아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계속 글을 써 내려가야 할 이유가 충분해진다. 어느 날 하찮은 순간과 기록이 모여 멋진 나만의 이야기, 나아가 멋진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첫 장을 쓸지 모를 일이다. 천재나 창의성을 핑계로 노력과 훈련을 멈춰서는 안 되는 거다.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천재적으로 보이는 뛰어난 사람들조차 그것을 공으로 얻어낸 적이 없다. 새로움이란 의외로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로부터 오는지도 모른다.
가능한 책을 많이 읽으세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요. 독서는 무엇이 좋은 글을 만드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물론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긴 해요.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을 흉내 냄으로써 문장력을 늘릴 수도 있을 거예요. 저는 그것이 글 쓰는 법을 배울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좋은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다음에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겠지요. 아마도 자기가 쓴 글의 90퍼센트가 마음에 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 정말 마음에 드는 딱 한 장의 글을 쓰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완성하게 되는 거지요.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과의 대화, 혼혈왕자 5권, 25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