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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07. 2020

관계란 시공간의 공유

사랑이란 시간의 점유

 3-4년 전의 일이다. 단톡방의 대부분은 알람 설정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단톡방은 내가 들어가기 1년 이상 전부터 만들어졌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아주 편안 마음으로 단톡방의 읽지 않은 글을 확인했다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2-3일 지난 톡의 내용은 선배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대학 졸업 이후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거나 연락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특정 시간 그 사람을 많이 좋아했다. 


 그 사람은 내 인생에 특별한 사람 중 하나로 기억된다. 특별한 사람이란 오랜 시간을 공유하지 않았으나 그 사람의 서사나 뉘앙스가 오랜 시간 생생히 내 기억 속에 부유함을 의미한다. 첫 만남 그녀의 손에 이끌려 동아리를 시작했다. 나보다 겨우 한 살이 많았던 그녀를 보며 대학에서 1년을 보내면 저렇게 어른스러움을 탑재하게 되는 건가라는 말도 안 되는 무의식을 내게 심어 주웠다. 생각해보면 나와 달리 이런저런 모임이 많고 활동적이던 그녀와 실제적으로 시간을 함께 보낸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녀에게 깊이 마음을 열고 그녀에게 마음을 전했던 기억 그리고 나의 진심에 응답하고 기뻐하며 에너지와 애정을 흔쾌히 내게 주던 실재적인 감각을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내킬 때마다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순간을 맘대로 꺼내보곤 했다.


 내가 그녀를 만날 수 없는 건 그녀의 죽음에 따라 결정되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한들 어떠한 기적적인 우연의 확률이 작용하지 않은 이상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죽음을 내가 알게 되는 것과 모르고 지내는 것 또한 감각으로 인지하는 나의 일상, 즉 현실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그 소식을 알고 약 일주일간 몹시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고 후회스러웠다. '이 세상에 더 이상 그녀가 존재하지 않아.' 이 문장이 내게 주는 타격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내 세계는 분명 무언가가 달라졌다. 


 나는 가끔 내가 생각했던 자살의 의미를 곱씹어보곤 한다. 당시 '무', 비어있음, 아무것도 없음, 완전한 어둠을 원했다. 지금에 와서 좀 더 명확히 설명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자연스러운 '소멸'을 원했다. 상처 없는 상실과 고통 없는 휴식, 존재가 완전히 지워진 다른 세계를 원했다. 그러나 비록 고통 없이 편안하게 생명을 끊는다 하더라도 이 세계의 현실에서 일단은 내가 존재했고 그 존재를 지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통과 걸리적거리는 문제들이 필연적으로 재생산된다. 내가 원했던 '자살'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나는 이별을 잘 견디는 사람이었지만 몇몇 존재들과의 이별은 나를 오랫동안 무척 슬프게 만들었다. 20살 이후에 내가 만든 관계는 아주 개인적이었다. 의무감도 없고 거미줄처럼 엮인 여타의 이해관계도 없는 일직선의 관계였기 때문에 그 사람과 나 둘 중 누군가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라고 결단을 내리면 그 관계는 완전히 소멸하고야 말았다. 표면적으로 그 사람의 존재 여부는 우리 관계에 아무런 차이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나는 나의 시간을 살아가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시간을 살아간다.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시계를 맞출 필요가 없다. 누군가 한 명이 죽어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서로가 관계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그순간부터 더 이상 서로의 시간을 점유하는 일은 기억이라는 내면적인 공간을 제외하고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나는 아끼던 누군가와 자연스러운 이별을 겪을 때마다 그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셈이다.


 나는 종종 그런 사람들의 삶을 투명인간이 되어 계속 관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상상을 하곤 했다. 나와 더이상의 시간을 점유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시간을 알고 싶었다. 내가 빠진 후 흘러갈 그 사람의 우주가 궁금했다. 더이상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한들 나는 그 우주의 서사를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점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지난주 우연히 내 세계에서 이미 죽은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인생에 큰 의미를 준 사람이었고 영원히 잊지 않을 관계지만 10년 가까이 그를 만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도 나를 찾지 않을 테고 나 역시 그를 찾지 않을 것이기에 의식적으로 서로를 부활시킬 리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시점 그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내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약 2분남짓 공유하게 되었다. 너무나 당황스러웠던 나는 그와 제대로 된 안부인사마저 나누지 못했다. 서로 살아있다는 자각 이외에 새롭게 알게 된 정보따윈 없었다. 죽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충격에 빠져서 하루를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보냈다. 3일 연속 그에 관한 비현실적인 꿈을 꾸었다.


 온몸에 세포가 난리를 쳤다. 
'그에게 즉각 시간을 공유해달라고 요구해. 내가 없던 시간들과 서사가 어땠는지 알려달라고 해.' 
내게 이런 권리와 자격이 조금도 없는 걸 알면서도 그가 어디선가 나와 상관없이 그만의 세상에서 잘 살아가고 있을 거란 걸 이미 알았으면서도 내 세계에 아주 잠시 그가 실재했다는 걸 눈 앞에서 확인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다. 그에게 과거나 미래의 시간을 점유하게 해달라고 요청할 의지는 없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는 그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얼마 전 헤어진 사람보다 오래전 헤어진 사람에게 여전히 정체모를 유대감을 갖고 연관되고 싶은 나의 비이성적인 욕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여전히 그가 존재하고 있어.'  이 문장 역시 내 안의 무언가를 꾹 눌렀다.



 과거의 한 시점을 떠올렸다. 그때 만나던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 요청하고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점유하던 관계. 그리고 지금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들과의 교집합을 떠올려본다. 그 교집합은 거의 남아있지 않는다. 안정적이었던 교집합이 시간을 무시한채 마구 뒤섞이는 혼란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만 예상보다 더욱 평정심을 잃게 했다.  


 다중우주, 멀티 우주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입증할 수 없지만 각자의 인생이 이미 다중우주와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시간을 내달라는 약속을 비연속적으로 잡곤 별 자각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혼자 오롯이 그 우주를 채울 수 없어서 누군가를 찾는다. 그가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큰 차이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동시의 그들의 시간을 점유해주길 요청받는다. 돌아오는 게 없는 일방적인 점유 방식에도 사람들은 불만을 갖긴커녕 더 열렬히 그들의 우주를 그 사람으로 채워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우주는 타인의 흠모를 받는다. 그 우주를 따라가기 위한 비법을 열심히 설파하고 모방하려 해보지만 애초의 그 사람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르기에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 


 각자의 시간을 완전히 함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누구도 누군가와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최대한 많은 시간을 타인과 점유하려고 노력하며 우리가 같은 우주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만들고 안심한다. 각자의 우주를 살다가 아주 짧은 시간 안부를 묻고 그동안의 근황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지닐 수 있어 긴 고독의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서로의 시간을 점유하는 존재였구나. 서로의 시간을 오랫동안 점유하기 위해 특별한 인상을 남기고 애정을 주고 같은 시공간에서 추억으로 삼을만한 일련의 사건을 겪고 서로가 보지 못한 그 시간을 짐작하기 위한 구성물을 끊임없이 건네는 거구나. 


 최근 나의 시간에는 타인의 도움없이 오롯이 견뎌내야 할 때가 많고 나는 자주 나약해진다. 자각할 수 없었던 일상이란 이름으로 찾아오는 타인의 우주. 내게 시간을 내달라 나의 세상을 알려달라는 서로가 서로를 실재하고 끌어당기는 관심과 애정이 사실은 엄청난 기적과도 같으며 동시에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의 시간은 그 사람 이외에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명제. 그것을 느낄 교집합의 시간은 생각보다 더 적을지도 모른다는 것. 우리는 자주 이미 타인을 죽음을 받아들이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고 그 모든 게 모여 또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해나가고 있다.


 나는 외롭지 않게 내 시간을 더 많은 타인과 더 사려깊은 누군가와 점유하며 보내고 싶은 것인지, 더 많은 타인의 시간을 기꺼이 차지하고 깊은 건지 헷갈린다.  


 정리가 엉망이지만 기록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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