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마음을 급히 달래줄 목적으로 과일차를 마시기로 했다. 물을 올리고 컵을 꺼냈다. 뜨거운 물을 붓고 꿀을 크게 한 스푼 집어넣었다. 베리믹스 티백을 넣고 우려내길 기다린다. 오늘 들어 묘하게 컵이 땀을 흘렸다. 아까 숟가락으로 꿀을 넘치게 휘저었나, 휴지로 컵 주변을 깨끗이 닦고 얇은 코스터를 깔고 책상 위에 그대로 놔두었다. 끈적거리는 손을 박박 씻고 돌아와 책을 읽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꾸만 컵 주변으로 티가 새어 나와 손에 묻었다. 평소 칠칠치 못한 탓에 내가 잘 못 마셨구나 싶어 다시 휴지를 꺼냈다. 이쯤 되니 알겠다. 티백의 종이가 젖어서 뜯겨 있었다. 코스터가 물로 흥건했고 컵 아래 있던 책상이 축축했다. 내가 흘린 게 아니었다. 이제 다시 물이 담길 수 없는 컵에 억지로 티를 담은 거다.
어제 설거지를 하면서 잠시 딴생각을 했고 그 참에 컵이 손에서 미끄러져 땡- 하는 파열음이 났다. 놀란 마음에 컵을 들어 살펴봤으나 다행히 깨진 곳이 없었다. 냄비에 물이 들어있어서 살았구나. 그래. 딱 한 번인데.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널 놓친 게 이번 한 번뿐인데 그게 그렇게 쉽게 깨질 리가 없지.
착각이었다. 너는 딱 한 번이라도 전부가 변해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더 이상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도 티 한 번 내지 않아서 나는 네가 깨진지도 모른다. 몇 번을 부정한다. 차라리 내 잘못이겠지. 이 것 저것 다른 곳에 놓아보고 내 자세를 바꿔보고 행동을 바꿔보며 네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오길 기다렸다. 파스텔 하늘색 사이 넌 티와 같은 빨갛고 가느다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제야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금이 갔는지 왜 예전과 같을 수 없었는지 단번에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너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엔 기억했다. 네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인지. 처음 널 받아 들고 혹여나 다칠세라 조심조심 다뤘지만 3년이 지나면서 너는 내게 너무나 당연한 존재가 되었고 관성처럼 너를 대했고 그래서 어제는 결국 널 잃게 되었다.
끝이란 걸 받아들이고 너를 보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괜히 아쉬워 싱크대 옆에 아직 씻지 않은 컵처럼 널 세워두었다. 너와 비슷한 컵이 세 개나 더 있지만 너의 하늘빛 파스텔 톤을 가장 좋아했다는 걸 이제와 고백해도 아무 소용없겠지. 모든 게 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인정도 이별도 안 되는 그런 때가 이따금 찾아온다.
P.S. 문보영님의 에세이를 읽은 후유증으로 모든 사물이 의인화되어버렸습니다. 아까운 내 컵. 크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