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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ug 21. 2020

타인을 향한 대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어린 날 조성모의 가시나무를 들었을 때 아무도 몰래 눈물을 훔쳤다. 뭔가 내 얘기를 들킨 것 같아 기쁘면서도 당혹스러웠던 감정. 아주 어린 날인데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조금은 앞으로의 인생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지독히 자신에게로만 향한 매몰된 시선, 세상 바깥일을 그다지 신경 쓰지 못할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거란 걸. 



오래도록 자아의 세계에 푹 빠져 나의 필터로 해석하고 사람을 나누며 안전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보안관처럼 살아온 나지만, 다행히도 진심을 가진 누군가와의 대화나 교류에는 관심이 많았다. 지겹고 지루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내 세계의 탐방을 잠시 잊고 타인의 한 세계를 모두 여행하고 싶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중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며 그가 아끼는 추억이라든가 사물이라든가 공간을 엿보고 싶었다. 그 사람이 자주 쓰는 필터라든가 그 세계에 들이고 싶은 사람이라든가, 그를 기쁘게 하는 것, 슬프게 하는 것, 그를 살게 하는 것, 그를 죽고 싶게 하는 것, 그의 두려움, 불안, 그를 만드는 모든 정신적 재질을 태양빛 아래서 들춰보고 싶었다. 물론 그가 허락해줄 수 있는 세계의 일부분에 한해서.



그때 나를 돌이켜보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서로를 들이는 범위가 점차 넓어지며 부담스럽지 않을 때 그 사람의 안내 없이도 그 사람의 세계 탐험이 가능할 때 친구, 연인, 내 사람이라는 관계가 정립되곤 했다. 



그동안 내게 '말'이나 '대화'는 결국 한 가지 목적으로만 기능했다. 누군가의 세계로 떠나는 수단.
타인을 설득하거나 무언가를 설명하는 일, 사실을 전달하거나 입담으로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 나의 효능감을 증명하거나 이 세계에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의사 표현으로서 기능하지 못했다. 내게 대화란 나와 타인의 관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TV 프로그램을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런 사람의 전형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내 주변 관계를 다져 온 사람 중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까닭이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무 바빠 타인의 말을 경청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라니 나의 세계를 대입해보며 실제로 그들이 바빠 시간이 나지 않아 볼 수 없을 수 있으나, 만난 자리에서조차 타인의 말을 허투루 넘기는 사람이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만 한다는 건 대화의 양과는 상관없다. 수다스러운 사람도 타인을 향한 순수한 관심을 드러내고 실제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어 질문을 던지고 분위기를 풀려는 의도로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나갈 수 있다. 반대로 몇 마디 말을 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제지하거나 불편함을 드러내고 누군가를 면박주기 위해 침묵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건 수량보다는 태도와 생각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간이 지나 우연히 어떤 대화를 해도 결국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시키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자신의 철학과 신조가 굳건했고 의사표현에 거침이 없었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사람은 성실하고 배울 점이 꽤 많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와 보낸 대화의 시간이 어떠했냐고 묻는다면 나름대로 즐거웠다고 대답할 것이다. 내게 있어 퍽 신선하기도 했고 그가 내게 인간적인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만큼 그는 내게 친절하고 지속적인 호의를 보여주였다.


처음에는 그의 대화가 어색함을 없애기 위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내가 던진 한마디에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말해주기 위한 관계에 대한 노력으로 비치기도 했다. 자신을 보여주고 나와의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려는 의지로 읽히기도 했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의 세계가 궁금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온통 그뿐이었다. 나의 모든 말과 생각을 오차 없이 그의 이야기와 그의 세계로 전환하는 성능 변환기에 질려버렸다. 내 얘기를 들을 때조차 그는 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할 게 뻔했다. 그는 내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곡해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어쩌면 그가 보여준 호감조차 내가 다른 사람과 달리 꽤 인내심을 지니고 성의 있게 그의 말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갖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당연히 다음 대화는 내 쪽에서 피하게 되었다. 그때 처음 일방적인 대화의 피곤함에 대해서 자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타인에게 구두쇠처럼 1g의 관심조차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늘어놓길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책에서만 영화에서만 사는 가상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소통하고 싶어요.'


이 말을 만날 때마다 빼놓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소통하자'는 사람 치고 소통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던 개그인 줄만 알았던 명제가 현실 세계에 등장한 순간이다. 소통을 하고 싶다면 그런 말 필요 없이 소통을 하면 될 텐데 그 사람은 매번 '소통하고 싶어요'라는 말만 기계적으로 뱉어낼 뿐이었다. 힘겹게 마련한 질문에는 방어적인 단답이 전부였으며, 내게 인간적인 호기심이나 관심을 가져준 적 없었다. 그 사람과의 대화는 꽤 심적 부담이 되었다. 어떤 말을 해도 튕겨져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맹이는 빼놓은 채 빈 껍질만 남은 곡식을 서로 후후 불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그러면서도 기회가 생기면 빼놓지 않고 내게 말을 걸면 '소통하자'는 말을 반복했다.


당신이 소통할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나 혼자 소통을 하죠?

정말인가요 정말이냐고요.


나는 몇 번이나 묻고 싶던 말을 목으로 삼켰다. 그가 소통을 배운 적 없기에 엉성한 것뿐일까? 아니면 그가 아는 소통의 모습은 내가 아는 소통의 모습과 한참이나 다른 걸까?

행동으로 변환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뱉는 게 타인에게 얼마나 껄끄러운 일인지 배우게 되었다. 그 이후로 소통하고 싶다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흠칫하게 된다. 




대화가 되지 않는 이유와 원인은 가지각색이지만 불편하고 지치는 대화로 귀결되는 결론은 동일하다.
감정의 시간차, 누군가 혼자 앞서가는 것, 같은 감정을 같은 시간 내에 느끼지 못하는 것. 대화에 마주치는 두 세계가 없다는 것, 노크도 없이 일방적으로 한 사람의 세계를 가득 펼쳐보이거나 절대 발도 못들이게 울타리를 치는 일. 그것조차 대화일까. 대화의 형식을 빌린 일방적인 입장표명에 가까운 말.




요새 들어 대화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내가 대화를 잘한다는 착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을 운 좋게 만나왔다는 것. 절대 진심만으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내 세계에 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한 세계를 자신으로 채우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타인을 향한 자리를 비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p.s. 정말이지 그 이후로 타인을 향한 관심을 요만큼도 없이 자신의 말을 쏟아내기 바쁜 사람들을 이상하게도 마주치고 있고 무척이나 피곤하다. 그들이 얼마나 흥미 있고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알까. 그들의 대화에 타인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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