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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Oct 29. 2020

타인의 눈치를 보고 글을 썼다.

다시 본질이 목적이 되는 삶으로

내 첫 독립출판물 Mi Cubano는 326p에 달한다. 편집하면서 조금 줄어든 분량이다. 원고를 쓴 기간은 길어야 세 달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당시엔 회사도 다니던 중이었기 때문에 퇴근 후 저녁부터 밤 사이 미친 사람처럼 글을 썼다. 


그때의 원동력은 이야기가 미치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발효과정이 일어나는 듯 꺼낼 수 없던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 혼자 틀을 잡아갔고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다고 짐승처럼 표효하다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과정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즐거움과 치유 그리고 한풀이에 가까웠다. 




최근 다시 글을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목차도 완성하고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할지도 머릿속에 그려놨다. 글의 목적 역시 분명했는데도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괴로운 마음으로 마우스 커서를 바라보며 문장을 쓰려고 애쓸수록 더 엉터리 같은 글이 되어갔다. '글이 퇴보했나, 글쓰기 근육이 사라졌나, 너무 오래 글을 쉬었나.' 후회하는 마음으로 예전에는 별로라 생각했던 글들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대체 과거의 나 어떻게 쓴 거지.




몇 시간 후 냉정을 되찾았다. 글쓰기는 고통에 가까운 과정이었고 쓰고자 했던 글은 예전에도 쓰기 무척 어려워했던 종류의 글이다. 설명과 정보를 담은 글쓰기, 담백하고 이해하기 쉽게 글을 쓰는 데 익숙치 않다. 자신 있는 글의 범위란 정해져 있었다. 일상적인 소재, 관계, 내면 관찰, 감정에 대해 주관적으로 써 내려가는 일기에 가까운 글쓰기(지금 쓰고 있는 글처럼) 


하지만 내가 쓰고 싶어 하는 글에 한정하더라도 Mi Cubano 이후 시작했던 모든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다. 처음의 결심과 들뜸은 오래가지 않았다. 글을 쓸 수 없을만한 이유를 찾게 되고, 그 글은 쓰이지 않는 편이 나을 거란 결론에 자주 이르게 되었다. 첫 원고 집필 이후로는 글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즐겁게 글을 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써 내려가는 고통이 쓰는 즐거움을 압도했고, 몇 문장 힘겹게 쓰고 나면 다음 문장에 대한 확신은 허망한 바다위 모래성처럼 사라졌다. 묵직한 바위에 눌린 사람이 되어 항복 선언을 했다. 




오래도록 Mi Cubano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소재가 지닌 강렬하고 특별한 힘 덕분이라 생각했다. 보통의 나라면 지구력을 지니고 절대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레'라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 남들이 겪지 못한 희귀한 사건, 강렬한 감정을 동반한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경험을 막힘없이 써 내려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가장 달라진 건 글을 쓰는 나의 태도이다. 그 원고를 쓸 때는 바라는 게 하나 없었다. 누군가 거친 욕만 하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 공격적인 반응을 나타나지 않는 한 그 글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기꺼이 쓰였다. 누가 봐주길 바라지도 않았고 그 글을 통해 칭찬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책으로 만들 목적도 상업적으로 이용할 마음도 없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고 해도 재미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 있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쓴 글은 모두 타인을 향해있다. 진정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의미를 남기고 싶어서 썼다기보다는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는 목적으로 글을 썼다. 몇 명이 내 글을 보는지, 몇 명이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지에 따라 그날의 글은 잘 쓴 글 혹은 못 쓴 글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싶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글을 올린 후 타인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눈치를 보고 글을 썼다. 그러면서도 배려나 타인을 존중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이기적인 글을 쓰지 않는 거라는 만족하며 자기도취에 취해있었다. 어느새 쓰는 즐거움 같은 건 부차적인 요소가 되어버리고 글쓰기는 나를 증명하려는 사회적 도구로 전락했다. 


결과와 목적을 또다시 혼동해버렸다.





최근의 모든 괴로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자기다움이란 말이 지겨웠다. 자기다움이 뭔지도 모르겠고 내 자기다움은 너무 구려 보였다. 자기다움 따윈 모르겠고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삶을 살지 못하는 나를 미워했다. 하루의 일상을 내가 만든 타인의 감시탑으로 두르고 매일 밤 품평회를 열었다. '오늘은 잘 살지 못한 것 같아. 이렇게 사는 사람 완전 한심하지 않아.' 변화를 위해서도 아니고 반성을 위해서도 아니라 나를 벌주고 창피하게 만든 고통으로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였다. 



나의 자기다움이란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가치니까, 나의 자기다움이란 세상에 통하지 않는 방식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 없는 대상이니,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내 세상에서 세상에 통하고 자본으로 환원될 만한 가치를 조금이라도 찾기 위해 골몰하며 괴로워했다.


자유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선택했던 나의 모든 결정을 폄하하고 이제 와서 타인과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며 모든 게 틀렸다고 애초부터 글렀다고 나를 몰아붙였다. 더 이상 어리광은 봐주기 힘들다는 협박을 동반한 채 말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여전히 세상의 일부가 나로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진정 나의 일부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의 욕망과 기분을 누르고 그들을 위하는 척하는 건 위선이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라 눈치를 보고 타인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행하는 가식에 불과하다. 그런 가식은 잠깐은 나를 보호하는 것 같아도 결국엔 숨통을 조이는 파괴적 행위이다.  그러니 세상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나를 위하고 원래의 나다움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런 자세 속에서만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쓸 수 있고, 죄책감 없이 상쾌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는데 나는 지금 자유 그 자체인데,  왜 그리 많은 의무감을 만들며 자유를 억압하고 죄책감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타인의 눈치는 그만 좀 봐라. 마음에 우러나온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라. 애초 나의 목적은 '자유'였다. 수많은 선택지 중 내가 택할 단 한 가지는 '자유'라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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