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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Sep 05. 2020

그대는 늘 내 옆에 앉아있다

비생산적인 활동을 할 때 불안을 내려놓고 고요 비슷한 상태가 되어 나도 나를 반쯤 떠돌 때 그대는 늘 내 옆에 앉아있다. 내가 그대를 떠올린 게 아니라 오롯이 혼자가 되고 눈 앞에 계속 보고 싶은 광경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마다 무슨 일인지 그대는 늘 내 옆에 있다. 그대는 그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린다. 내가 왔다 내가 떠나는 것이다.



가끔은 깨어있을 때도 그대 생각을 한다. 그때 그대는 내 옆에 없다. 그대의 부재를 꼬집어가며 그대를 택하지 않은 삶을 되짚어본다. 그럴 땐 머릿속에 이성이 가득하다. 명백히 그대 옆을 선택하지 않은 건 나다. 그대의 육체도 웃음도 온기도 그려보질 않는다. 그럴 때 그대는 그저 생활인이고 파트너로서 고려될 뿐이다. 



나는 모든 것을 혼자 해낼 자신이 없다. 만약 그대가 옆에 있었더라면 내 삶의 모든 것을 철저히 내가 선택했을 거다. 2인분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생활인으로서 난 몇 배로 강해지고 몇 배로 뛰어다녔을 거고 세상과 접촉면이 몇 십배 늘어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몽상가적이고 나태한 삶의 여유는 반의 반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보다 수많은 갈등과 시련을 견뎌내고 고통에 무뎌져야 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잘 돌볼 수도 없고 세계의 흐름을 잡아내지도 못한 채 삶에 떠밀려 살아가기 급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더 많은 글을 쓰고 더 많이 쓰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더 빨리 예술가다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대를 선택하지 않은 건 예술가적인 삶을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를 사랑했던 건 불안과 방황의 존재감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대와 함께 있을 때 삶이 고달파지는 만큼 나는 내가 아닌 존재가 되기 쉬웠다. 일시적인 상태로 영원을 살 것만 같아져 삶이 가벼웠다. 그대는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반 밖에 알지 못했음에도 멀어지지도 뜨거워지지도 않는 신소재 물질처럼 영원히 나를 기이하게 사랑해줄 것만 같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대를 계속 사랑했다면 나는 나를 버리기 훨씬 쉬웠을 것이다. 지금과 모든 것이 달랐을 것이며 온전히 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일 울었을까? 그때처럼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고 또 울다가 웃었을까?



이별을 후회한 적 없다. 그대를 택하지 않은 삶도 후회한 적 없다. 그러나 그대를 보지 않기로 하며 그대를 내 세계에 영원히 잡아두었다. 그대는 말을 잃었고 온기를 잃었고 욕망을 잃었다. 나는 그대의 존재만 남겨 내 곁에 두기로 했다. 그때부터 그대는 0이 되었다. 혼자 남을 때 그대는 늘 곁에 있다. 혼자 남는 건 그대 옆에 앉는 행위가 되었다. 나를 내보낼 순 있어도 그대를 내보낼 순 없다.


그대를 사랑하며 느껴진 충만감을 가둬 내 안에 잡아두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그대를 떠나보낸 이유이자 그토록 그대를 사랑한 이유이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다시 그럴 자신이 없었다. 신물질 같은 그대를 가둬 나를 잊어갈 때 나를 대신할 존재로 내 세계에 묶어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차라리 그대를 영원히 떠나보냈다. 그래서 그대가 그립지 않다. 혼자 남아도 괴롭지 않다. 방황해도 두렵지 않다. 고독이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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