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약성 데이
4년 만에 면접을 봤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발표를 한다든지 시험을 봐야 한다든지 비일상적인 미션을 받은 상황에서 언제나 가슴이 세차게 뛰곤 했습니다. 동네 체육대회 계주를 앞두고 벌컥벌컥 요동치던 심장소리가 생생합니다. 자극에 대한 반사적 신체 반응이 민감하고 심장의 맥박 속도가 유독 빨리 달리는 건 선천적으로 타고난 조건이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필기시험이나 체육 활동을 하는 건 곧 괜찮아졌습니다. 긴장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거든요. 심장의 소리나 긴장도는 무시한 채 집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죠.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하거나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던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부르는 건 좀처럼 괜찮아지지 않더라고요.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은 실기시험이 끝난 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리코더를 부른 제게 병원을 가보라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떨고 싶지 않아서 이 긴장감을 완화하고 싶어서 많이도 참 많이도 방법을 찾아 헤맸던 것 같습니다. 청심환도 먹어보고 신경과에서 안정제도 복용해보았는데 소용없더군요. 면접이나 발표를 앞두고 떠는 이유를 세상은 이렇게 정리하더라고요.
1. 너무 간절하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2.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3. 익숙치 않고 생소한 행위라서
보기에는 그럴듯하고 합리적인 가설이었습니다. 제가 면접이나 발표에서 너무 떨리고 긴장된다고 말하면 상대방은 '누구나 다 그래요.' 무신경한 대답을 하지요. 연습을 더 해보라고 조언을 해주거나, 많이 하면 할수록 느는 법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어쩐지 이 이유는 제겐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전 여기에 모두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아무 결과가 상관없는 조모임 활동에서도, 이미 모두 친하고 편안한 4~5명 앞에서도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앞에 나가서 말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인생 최대의 결정적 사건이라도 된 듯이 똑같이 떨렸습니다. 앞으로 보지 않을 사람들이야, 편안하게 하자, 겁먹지 말라고 저를 설득해봐도 소용없었습니다. 중요도는 상관없었죠.
준비가 덜 되었나, 자신이 없었나란 의심도 많이 해봤어요.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죠. 누군가의 앞에서 조리 있게 설득력 있게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그러나 대본이 있어도 연습을 아무리 해도 제가 잘 알고 있고 자신 있는 주제에도 준비가 완벽했어도, 긴장감은 완화되지 않더군요.
제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럴수록 발표도 많이 해봐야 하고, 일부러 그런 자리를 적극적으로 찾아가면 된다고 조언하더라고요. 놀랍게도 전 초등학교 때부터 누군가의 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대회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아이였습니다. 합창부, 육상부, 자연탐구대회도 나가고 영어 말하기 대회도 나갔죠, 발명왕 대회에 나가서 제가 만들지도 않은 발명품에 대해서도 설명하기도 했고요. 수업시간에도 자주 손들고 발표도 했고요, 어디가서도 어색하게 먼저 말하실 분을 찾을 때면 그때마다 항상 먼저 하겠다고 손을 들고 제 의견을 말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달 떨리는 긴장감은 그대로였습니다. 하면 할수록 편해지긴 커녕 점점 더 떨리더라고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놓여있다고 생각만 해도 떨립니다. 일주일 전부터 매일 떨려요. 망쳐버릴까 걱정이 돼서도 아니고 그게 제게 절실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떨려요. 이유는 모르지만 떨리는 감각은 너무 날것의 현실이었죠.
그러다 어제 4년 만의 면접을 앞두고 샤워를 하면서 문득 제가 떠는 정확한 이유를 알아냈어요.
그건 바로 면접이 제가 제일 자신 없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은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이죠. 저의 단점을 들킨다거나 질문에 조리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거나 내용이나 결과로써의 저의 취약성을 드러낸다는 말이 아니에요.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 제가 가장 자신 없고 바보같이 덜덜 떨며 긴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면접이란 행위 자체가 괴롭고 발가벗은듯한 취약성을 드러내는 일이죠.
처음 시작은 뭐가 되었든, 상대방이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저는 달달 떨며 긴장하는 저를 보며 그 순간에 느끼는 감각과 생각 그 행위 자체가 너무 두려운 겁니다. 그것을 상대방과 공유하는 경험이 끔찍하고요. 한마디로 면접날이나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날은 그야말로 저의 취약성 데이죠.
얼마 전, 저 자신을 그럴듯하게 방어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 노력하려는 모든 행위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었죠. 바보가 바보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에너지 낭비에 정작 중요한 일은 하지 못하고 온 신경을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삶이 힘들고 정말 바보 같았거든요.
면접, 이게 내 취약성이라 덜덜 떨리는 거구나, 여전히 나를 놓지 못했구나, 바보 같은 모습을 되도록이면 타인에게서 보여주고 싶지 않고 나를 방어하고 싶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걸 여태 몰랐다니, 이유가 뭐가 되었든 수용하기로 했어요. 앞으로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떨 게 뻔하고, 그걸 막으려고 할수록 더 떨어버리겠지. 차라리 덜덜 떨자. 덜덜 떠는 호사를 누리지. 남들은 자연스럽고 멋진 어조와 말투로 면접을 볼 때 나는 마음껏 떨며 질문에 대답도 못하고 완전히 바보가 되어버리자. 그 바보 같은 모습이 내게 얼마나 자유를 줄지를 느껴보자. 떠는 것과 상관없이 내가 할 말을 하고 나를 보여주고 오자. 떠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편안하더라고요. 물론 그래도 어차피 떨리더라고요. 면접 전 명상을 한 시간 반 했고요, 가는 길 내내 제게 용기를 줄 원슈타인님과 Zior Park님의 곡을 내내 들었고, 도착한 역에서는 이장원 님이 부른 She's baby 동영상을 재관람하며 풋-하고 긴장감을 놓았습니다. 막상 면접은 제가 생각한 면접과 상당히 달라서 또 편안하게 해 주신 덕분에 (자기소개도 시키지 않고 완전히 대화체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더라고요) 덜덜 떠는 그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 면접을 보거나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면 다시 덜덜 떨겠죠.
그러나 이제는 덜덜 떠는 제 자신을 보여주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고요. 멋없고 바보 같으면 어때요. 그래요, 이게 내 단점입니다. 마음껏 구경하십쇼. 세상 이렇게 떠는 인간이 여기 있습니다! 제 취약성을 드러낼 용기가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