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발견하고 초석을 다진 멋진 한 해
영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은 없지만, 2020년은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을만한 신기하고 의미 있는 한 해였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써보기로 한다.
워낙 건강한 체질이고, 체하거나 아프더라도 금세 낫기 때문에 올해만큼 원인 모를 지병을 달고 산 건 처음이었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9월까지도 간헐적으로 꾸준하게 소화기관, 특히 위가 끈질기게 아팠다. 밤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던 적도 있어서 남편이 걱정을 많이 했다. 떡볶이를 평생 먹지 못하는 거 아닌가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뚜렷한 원인은 여전히 모르겠다. 두 번이나 위 내시경을 받았는데 의외로 별 게 없이 괜찮다는 결과. 그동안 운동도 하지 않고 폭식도 하고 몸에 좋지 않은 달고 짜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여러모로 건강하지 않은 식생활 탓이 아닐까 반성도 많이 했다. 많은 기간 아파서 잠에 들지 못하고 새벽에 깨서 뒤척이는 일이 많았다. 굶기도 많이 굶고 미음 같은 죽으로 식생활을 대신하는 나날도 많았다.
괜찮아졌다가도 별 거 먹지 않았는데 계속 아파서, 우유도 끊어보고 온갖 밀가루 음식, 튀김 음식도 다 끊어 보았는데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먹은 게 없는 데 아픈 날이 많았다.
10월쯤부터는 완전히 회복되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이것저것 신나게 먹다가 3일 전부터 소화기관이 작동을 하지 않아 오늘 하루 종일 굶었다. 소식하고 몸에 좋은 걸 많이 먹어야겠다는 어리석은 반성을 했다. 이제 아파도 항변할 수 없는 나이구나. 몸을 왜 이리 챙기지 않는 것인가, 반성하는 한 해이다. 무엇보다도 건강하자.
표면적으로 부족할 게 하나 없고 안정적인 일상을 누리면서 남몰래 조용히 정신 밑바닥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대략 1월부터 10월이 되기까지 지겨우리만큼 방황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죽진 않을 거지만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않을까란 회의적인 결론에 여러 번 치달았다. 존재론적 위기라고나 할까, 18살 이후로 이렇게까지 이유 없이 괴로워한 적이 있나란 생각도 했다. 그동안 경험이 있어서 티가 날 정도로 울거나 우울해하지는 않았지만, 무기력에 시달려서 빠져나올 생각을 못했다. 멍하니 누워서 TV나 영상을 보기도 하고,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서 잠 들지 못한 날도 많다. 명상도 하지 않았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모든 게 다 귀찮고 피곤했다. 사람과의 만남을 극도로 피했는데 오히려 코로나라는 핑계를 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란 인간이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게 없다면 어떤 의미로 살아야 하는지 한 치 앞이 예상되지 않았다. 후회는 할 수 없지만 과거에 했던 모든 멍청한 선택이 나를 만들었고, 이미 내 인생은 망한 게 아닐까란 좌절감에도 빠져 있었다. 그 모든 방황의 끝에는 자기혐오와 무력감만이 날 반겨주었다.
왜 나는 사춘기도 아닌데 20대도 아닌데 이 나이 먹어서까지 이런 답도 없고 짜증 나는 고민을 하며 살아갈까? 방황이 지긋지긋하다란 생각을 제일 많이 한 것 같다.
방황에 시달렸기 때문에 역으로 하루의 일상이라도 제대로 살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여러 가지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한 해 이기도 했다.
디지털마케팅 크리에이터 과정을 들으며 오랜만에 수업을 듣고 마케팅이란 뭔 지, SNS 활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고 무엇보다도 고등학교로 돌아간 듯 학우들과 수업을 듣는 재미를 느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현타가 자주 밀려왔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걸 배우는 건 항상 재밌고 보람차다. 또 그 수업 덕분에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고, 인스타그램 글귀 계정도 열심히 운영해 보았다. 그 이후 고물다방, 본질대화클럽이란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해봐야겠다 마음을 먹고 시도해보기도 하고.
소소한 기쁨을 스스로에게 주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다. 말로만 들여오자 했던 초록이 화분, 반려 식물을 장만해서 아직까지는 겨우겨우 살려내고 있는 중이다. 겨울이 되어서 게을러졌지만 매일 1시간 넘게 산책도 하고 10월부터는 매일 명상하고 있다. 타로를 사서 셀프 타로를 보고 있기도 하다. 재미와 소름 돋음의 연속, 크리스마스에는 조촐하게 파티도 열어보았다. 그동안 왜 이리 재미없게 살았지 싶었다. 매년 더 많이 느끼고 행복해하고 많이 웃어야지.
10년도 넘게 장롱 속에 묻어 둔 면허 해제를 해보겠다며 운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여전히 혼자 운전은 불가능한 데다가 주차는... 과연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해봐야지, 기동력을 늘리고 싶다.
어쩌다 보니 운좋게(?) 스타트업 그동안 연관 없던 새로운 직무 지원도 해보고 면접도 보았다.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연초의 무기력함을 기억하자면 면접까지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기에 장족의 발전(?)인지라 기특하다.
평소에도 과하게 하는 편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신과의 대화를 깊이 끈질기게 폭넓게 한 한해였다. 많은 방황과 괴로움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10월 어느 한순간, 놀라울 만큼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깨어 있는 게 무엇인지 자신을 비우는 게 무엇인지 이전 머리로 또 순간적으로 어렴풋하게 알던 감각과 직관이 깨어나 꽤 오래도록 평온하게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겠고 이것이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믿음이 생겼다. 아니 무너지고 슬퍼지더라도 곧 회복할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생겼다.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각도에서도 새로운 깨달음을 많이 얻은 한 해였다. 스스로에 관해 끊임없는 자극과 인내심이 필요한 변덕쟁이라는 것도(안정회피형 인간), 나의 삶을 구성해 온 축이 받아들임의 문제라는 것도 그동안 눈치 보고 세상의 인정을 얻기 위해 쓸데없이 소모적으로 인생을 낭비해 왔다는 것 또한.
그동안의 삽질과 방황과 바보 같은 삶들이 모두 이어져 지금으로 통합되는 기적을 느끼자 원래도 운명론자였던 성향이 더 짙어졌다. 그 순간에는 나쁘거나 의미 없이 보이는 자잘한 사건들 또한 꼭 맞는 시기에 꼭 맞은 강도로 내게 일어난 덕분에 지금의 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조금만 어긋나도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직관이 더 깨어난 기분이다. 인연도 사건도 내가 필요한 건 꼭 내게 주어지리라, 그러니 지금의 내 삶과 나라는 인격체와 영혼이 너무 소중하고 특별하다.
하나도 특별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아니라서 정말 특별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다 보니 그동안 품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사실이 발견되었다. 내 자아의 신화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걸, 대가 없이 사랑하고 받는 거, 그렇게 세상과 나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마음이 아닌 영혼으로 받아들였다.
여전히 가끔은 흔들리고 방어기제도 작동되고 잠들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 내가 원했던 걸 손에 쥔 기분이다. 더 이상은 막막하거나 두렵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이 되는 법을 알았기에.
아직 구체적인 실체는 없지만, 평생에 걸쳐 만들고 싶은 본질대화를 나누는 커뮤니티를 기획해 보았다. 조급해하지 않고 완성도와 멤버 선정에 공들여서 대단하고 멋진 세상의 하나뿐인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평생의 과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넘어야 할 산이 오조오억 개이지만, 과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이름을 결정하고 선언을 한 것만으로도 2020은 소중한 한 해이다.
작년 말부터 괴로워하고 고민도 많았던 글쓰기, 그동안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우겨 보기도 했고 방황하는 시기 글이 하나도 안 써져서 글을 놔버리기도 했다. 내 글이 사람들이 좋아할 구석이 하나 없는 마이너의 향으로 그득찬 의미도 재미도 없는 무의미한 산물 같아서 많이 밉기도 했다. 첫 책에 대한 애증도 상당했고. 디지털 마케팅 수업을 들으면서는 내 색깔을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할 글을 써보자고 결심하기도 했는데, 내가 깨달은 건 난 절대 그런 글을 쓸 수도 없고, 끔찍하게 그런 글을 쓰기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에 우러나오지 않은 글을 쓸 수는 없다.
과정은 생략하고 요새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작가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글을 쓸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글쓰기는 나의 주업이자 과업이다. 타인의 시선도 세상의 평가도 상관없이 오롯이 나 같은 글을 쓰자. 의미도 소용도 상관하지 않고 계속 글을 써나가자. 내가 느끼는 감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 생각을 최대한 글로 풀어내기 위해 노력해보자. 보이지 않고 애매하고 모호한 본질들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글을 쓰자. 나는 글로 예술을 할 거다.
길고 지루하지만 일련의 키워드를 통해 2020은 진정 나를 발견하고, 초석을 단단하게 다지는 전환기, 지표 같은 한 해였다. 내 인생을 돌아보며 2020을 기점으로 과거의 나와 현재와 내가 나눠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이렇게 길게 썼지만,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글을 통해 표현되는 건 그리 다르지 않아서 달라진 실체감은 결국 나만 느낄 수 있다. 아무튼 더없이 멋진 2020이었다.
- 올해의 책: 리얼리티 트랜서핑
방황의 끝점을 찍어준 정신적 근간이 되어준 책, 두 번째 읽으며 공감과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 올해의 작가: 페르난도 페소아
당신과 나 사이엔 운명의 끈이 있다고 믿는다. 제주도에서 우연히 당연하게 발견한 시집의 시작으로, 불안의 글을 읽고 너무 좋아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은데
- 올해의 팟캐스트: 필름클럽
김혜리 기자님, 최다은 PD님, 임수정 배우님의 다정한 필름클럽, 많은 위로와 영감을 주었다. 원래 간헐적으로 듣긴 했지만 올해 유독 내적 친밀감을 느끼며 산책길, 오고 가는 길에 열심히 들으며 사랑을 느꼈다.
- 올해의 가수: 원슈타인, 싱어게인 30호 가수 이승윤
오리지널리티, 진짜가 있는 사람들, 타인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고 세상의 편견과 인정과 상관없이 꾸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자신의 확신과 색이 있는 삶이 무엇인지 그들을 보며 많은 감동과 영감을 받았다.
- 올해의 앨범: 해쉬스완의 Silence of the REM
최근 듣지 않다가 10월이 되어서야 알게 된 해쉬스완의 앨범, 내가 이래서 그를 좋아했지 생각했다. 가사도 노래도 내 취향. 이상하게 그 앨범을 듣고 있다 보면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이런 앨범 같은 글을 써야지라는 다짐을 했다.
- 올해의 노래: Zior Park의 lonely diver
한국 노래라는 게 충격적일 만큼 감각적이고 새로운 음악. 용기가 필요하거나 우울할 때 무한 반복 중 오래도록 플레이리스트에 담겨있을 것이다.
- 올해의 영화: 테넷
올해는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다. 극장에서 본 작품은 테넷이 유일하다. 코로나임에도 불구하고 극장에 가게 만든 작품, 그리고 왜 집에서 TV로는 극장 스크린을 대신할 수 없는지를 느끼고 오기도, 다소 난해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시간에 대해서도 고찰하게 해 주었다. 다시 꼭 봐야지.
- 올해의 드라마: 오렌지이즈더뉴블랙, 메시아
재미와 마음이 가는 작품이라면 단연 오렌지이즈더뉴블랙, 내가 이 드라마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지 몰랐다. 캐릭터에 푹 빠져 울고 웃으며 정주행하고 여운이 오랜 기간 잊히질 않았다. 의도치 않게 주인공을 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깨달은 건 덤이다.
의미면에서라면 메시아, 처음 보다가 다소 지루해서 포기한 드라마인데 언니의 추천으로 보게 된 작품, 처음 봤을 때는 충격적이고 와 닿지 않은 부분도 많은데 오히려 시간이 지나서 이 드라마가 어떤 드라마인지 뼈저리게 이해하게 된 이례적인 드라마이다. 둘 다 Netflix 오리지널이다.
- 올해의 대화: 라라님과 나누는 주 1회의 대화
요새 내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 활동, 자세히 적진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