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많이 찌질하고 소심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새해 초부터 우아한 사람, 여유있고 단단한 사람이 되자. 누가 뭐라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 되어야지. 노 아랑곳 정신을 탑재하자고 했던 다짐이 무색해진 하루다. 슬프지 않은 척 해봤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역시 조금 슬프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맞아 나는 이런 인간이었다. 슬플 필요 없는 일에도 괜히 슬픈 인간, 과거엔 슬픔 중독이나 슬픔을 안정제로 삼고 있는 건가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했다. 역시 변태가 분명하다.
둔한 동시에 예민한 인간이란 수식어를 갖는 건 생각만큼 모순적이지 않다. 마룻바닥에서 이불도 베개도 없이 밝은 불빛에도 곤히 잠든다. 수평이 조금 안 맞거나 책에 파란 반점이 인쇄되어 있어도 잘 모른다. 친한 친구의 머리 모양이 달라져도 눈치채지 못한다. 기념일 같은 건 기억할 생각을 못 하고 생일도 자주 잊어 생일 축하해란 말을 번번히 놓친다. 몇 달 연락이 없어도 초조해지는 법이 없다. 옷에 뭘 묻히거나 구멍이 나도 팔꿈치에 멍이 들어도 며칠 후에나 발견해서 원인을 찾을 수도 없다. 노트와 책을 대충 구겨 넣은 가방을 흐트러진 채로 적당히 멘 탓에 버스에 올라타면 한참을 카드지갑을 찾는 사람, 번잡한 소음 속에서도 책을 읽거나 영어 단어를 암기하는 사람, 까탈스럽지 못한 둔함은 일상 곳곳에 베어져 있다. 저렇게 헐렁하고 어설프게 살아도 괜찮나 걱정이 들만큼 그다지 가리는 게 없고 채워 넣어진 것도 없는 밀도 없는 삶.
반면 나의 예민함이란 이런 것이다. 누구 하나 날 구박한 적도, 비난한 적도 없는데 하루 새 달라진 공기에 어깨가 잔뜩 움츠려진다. 필요한 책이 서점에 없을 때, 20분 거리의 다른 서점에 가자고 부탁할 때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하며 눈치를 본다. 음식점이 휴무일이라서 예기치 못하게 오랜 시간 길거리를 걸어야 할 때 달라진 게 없는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며 식은땀을 흘리기, 매번 인사를 해주던 누군가의 인사가 더는 오지 않을 때, 내가 보낸 사과 혹은 감사함의 메시지를 그저 읽고 지나쳤을 때, 심심찮게 실없는 문자를 주고받던 누군가의 연락이 다시 오지 않을 때, 심각하게 내가 뭐 실수한 게 있나 고민한다. 지레짐작하지 말고 물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애매한 사이에는 물을 수 없다. 그 물음이 나를 더 멀어지게 할까 봐 겁이 난다. 아니, 나는 적당함을 모르니까 돌려 말하거나 센스 있게 유머를 담아 마음을 전하기보다는 ‘내가 뭐 실수한 게 있어? 이제 내가 싫어졌어?’ 대놓고 말할 게 뻔하니까. 그런 말은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며칠 전까지 꽤 서로를 이해한다고 단단한 경계 안에 한 데 묶여 있다고 확신했던 관계는 한 밤의 추측만으로 애매한 사이로 변모된다. 언제든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 미움받아도 싫증 나도 어색하지 않을 관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제 그 사람과 나의 사이가 더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아니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 확신한다.
그 사람의 인생에 내가 그다지 중요한 사람일 리도 없는데, 그 사람이 내뱉는 모든 말이 내게 보내는 신호일 리도 없는데, 그렇게 의식해 버린 누군가의 아픈 말과 쓸쓸한 글은 모두 나로 향해지는 것만 같다. 정작 그들은 나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을지도 모를 텐데 나는 문장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절벽 아래로 낙하한다. 익사할 수 없는 의심과 예민함의 바다에 갇혀 질식에 가까운 잠수를 한다.
그들이 내게 그럴 만큼 중요한 관계인지를 반문해보았다. 그렇진 않았다. 다시 못 볼 사이라고 해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왜 나는 한 번 받았다고 믿었던 애정이 사라지는 모든 관계에 왜 그리 집착하는 걸까, 마음을 한 번 받았다는 기억 앞에는 합리성도 그동안의 성장도 모조리 무너지고 치기 어리고 감정적인 사춘기 소녀가 되어버리는 걸까. 왜 그 애정을 거둬가냐고 반박하고 변명하고 애원하고 울고 싶어지는 걸까, 다른 수많은 모호함에 매혹되면서 유독 관계의 모호함만은 견디지 못해 차라리 칼로 베어내길 마음 깊이 바라는 걸까, 차라리 ‘이제 네가 싫어졌어. 더 이상 말 걸지마. 넌 짜증나는 인간이니까.’라는 말을 육성으로 듣고 싶어 하는 걸까.
또다시 방어기제를 작동해 적당히 거리를 두자,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말자. 애정을 함부로 주지 말자. 같은 유아기적 발상이 떠오른다. 이내 지웠다. 난 그래도 마음을 줘야지, 난 그래도 마음을 열어야지, 난 그래도 열렬히 사랑해야지. 다만 그 모든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잘못이다.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문제구나, 사랑하는 사람들 아니 날 사랑해준다고 믿었던 누군가에게는 계속 사랑받고 싶은 이상한 욕심. 허나 예민한 감각과 주인공이 된 기울어진 시점의 망상만으로 그 누구에게 원인을 물을 수 있을까, 그들의 모습에서 읽는 건 이런 나의 욕망뿐인 것을, 변명도 필요 없다. 되돌리려는 시도도 소용없다. 이런 예민한 감각이 날뛰더라도 진정 가슴에 묻어두지 않은 채 흘러 보내주기, 초연해지는 것 그게 나의 이번 생의 미션이다. 또한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처음 관계를 맺는 사람처럼 그 어떤 선입견도 방어기제의 발동도 없이 기꺼이 맞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