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윤 Dec 12. 2020

사실은 엄마를 닮았네

시간이 지나고보니 DNA뿐 아니라 행동양식까지

반가운 손님



나른한 오후, 뒹굴거리다 잡아든 핸드폰에 타이밍에 좋게 보이는 동생의 카톡


'언니 어디야? 뭐 하고 있어?'


오늘 하루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마법적인 힘이 깃든 말이었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강화되면서 원래 계획한 스케줄이 취소된 동생은 그렇게 갑자기 뜬금없이 우리 집에 놀러 오게 되었다. 벌떡 일어나 집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후다닥 씻고 근처 빵집과 마트도 들러 간식거리를 샀다. 평소라면 귀찮았을 집안일도 마트 보러 가는 길도 걸음마다 기쁨이 넘친다.



만나자마자 기쁜 마음에 얼싸안고, 차를 끓이고, 과일을 씻어내고, 서로 사온 디저트를 꺼내 준비한다. 마침 해가 잘 드는 시간이다. 도란도란 티타임을 가지리란 기대로 사두었지만 평소엔 혼자만 애용하는 베란다 6인용 테이블에 드디어 손님이 찾아왔다. 



가까이 살면서도 동생을 못 본 지 1년이 넘었는데 동생은 오자마자 연신 '좋다.', '너무 좋다.'란 말을 감탄했다.  먹고 마시고 수다 타임, 그동안 사는 얘기를 나누고, 수상한 야매 타로도 봐주고,  관심사도 공유했다. 시간은 또 나의 감각을 앞서 저만치 흘러갔고, 그렇게 간식도 시간도 넘치게 맛있게 먹고는 아쉬운 마음으로 동생을 배웅해주며 돌아왔다.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리는 게 싫었다.



시골 동네에 살면서 누구 집에 놀러 가고 반찬 나눠먹고 이런 일은 예사였다. 그때 동네 사람들은 단순한 옆집 사람이 아니라 친구고, 언니고, 이모고 삼촌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애정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들에게 국한된 이야기였다.


20살이 넘어 부모님이 할머니 댁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후에는 최대한 그 집을 가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 집은 우리 집이 아니니까, 그건 모두의 집이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할머니 집에서 산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언제 어디서나 무조건적으로 공동 공간의 호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 집에 한 시간이라도 있다 보면 동네 사랑방이라도 된 듯 예고 없이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엄마는 집 문을 잠그는 법이 없었고, 나와 제법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을 보면 밥을 먹었냐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자리를 비웠다. 나는 대체 내가 왜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날이 많았다. 


1년에 한두 번 명절이 다가오면 마지못해 엄마 집에 방문했는데 결혼도 안 한 주제에 명절증후군에 시달렸다. 요새는 숫자도 줄고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어릴 때 명절만 되면 제사도 준비하고 3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의 아침밥을 준비해야 했다. 가사노동이 고된 면도 있지만(사실 난 그다지 열심히 참여하진 않았지만) 그것보다도 예민하고 까칠한 나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한 무대기의 사람들과  밥을 먹는 시간 자체가 고역이었다. 숨을 곳이 없었고, 혼자 쉴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내게 물을 떠달라거나 반찬을 채워달라는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엄마는 당연히 제일 바빠서 사람들이 밥 먹을 때조차도 부엌에서 연신 일을 했다.  사람들이 다 먹고 나간 후에야 남은 밥상에서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며 대충 끼니를 때웠다. 



그때 보면 엄마와 아줌마들은 불만을 토로하고, 불합리함에 대해서도 말하다가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함께 웃었다. 술을 마시고 군말 없이 쉬지도 못하고 1시간 후 곧바로 점심을 준비했다. 그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적어도 엄마의 웃음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엄마는 호스트가 되는 삶을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다. 엄마는 사람들이 집에 오고 북적거리는 걸 좋아했다. 엄마는 많은 가족들이 한 데 모이고 자신이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은 후, 가는 길에 직접 농사진 농산물과 반찬을 잔뜩 싸주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정말 싫었으면, 거절할 수 있었다. 비록 다른 누군가가 그 역할을 떠맡지 않고 그 집이 와해되더라도 조금의 욕만 먹으면 될 일이었다. 적어도 절대로 엄마에게 그 일을 맡지 않았다고 욕하는 사람은 엄마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엄마가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조용한 집이 갖고 싶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이라도 내 공간에 누가 침범하는 게 싫었다. 원룸에 살아서 공간 자체가 협소하긴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작은 원룸 공간으로 매일 사람들이 들락거리곤 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손님을 초대하는 일은 결코 없었고, 누군가가 내 공간에 놀러 와 내 자리를 차지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났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나는 절대 호스트가 되지 않을 거야. 내 공간을 지킬 거야. 애매한 사이의 타인과 거리를 두며 타인의 존재에 피곤함을 느끼며 늑대개처럼 영역을 지키며 살아왔다.





사실은 엄마를 닮았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운이 좋게도 꽤 넓은 집에 살게 되었다. 구택이라 특히 거실이 넓었다. 베란다를 어떤 공간으로 만들까 고민을 한 끝에 사람들이 놀러 와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6인용 거실 테이블이 갖고 싶어 졌다. 동네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내 공간으로 초대해 함께 커피나 차를 마시고, 대화를 하며 즐거운 기억과 추억들을 쌓고 싶다. 10여 년이 지나 까칠했던 나는 자발적 호스트가 되고 싶어 했다. 마치 엄마처럼 



누군가가 온다고 하면 설렌다, 귀찮았던 청소도 콧노래를 부르며 하게 되고, 음식 솜씨는 없지만 최대한 맛있는 걸 해먹이고 싶다. 남편에게도 챙겨주지 않는 간식을 사서 함께 나눠먹고 싶고, 커피든 차든 어떤 다른 음료든 취향대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냥 그게 좋았다. 뭘 바라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다신 그 사람이 우리 집 놀러 오지 않더라도 그 시간이 자체가 좋았다. 그 사람이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리 하고 싶었다.



얼굴 빼고는 엄마와 닮은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울감에 시달리는 소심하고 사람을 싫어하고 예민한 성향인데 엄마는 내추럴 본 외향적인 사람이고, 살면서 우울했던 적이 없으며 무신경하고 사람이 없으면 병이 난다. 엄마가 어느 날 내 손을 잡고 진지하게 미안하다고 한 날이 생각난다. 엄마는 그래 본적이 없어 이해 못해서 미안해. 그날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엄마를 이해하는 건 내 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 싫지만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엄마에게 이해받기보다는 내가 더 이해해주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엄마를 닮았다. 나이가 들고 상처가 치유되고 내 모습을 찾으면서 깨달았다. 우린 생각보다 꼼짝없이 닮은 부분이 많다는 걸. 나는 엄마처럼 사람을 좋아한다. 그들을 만나는 시간이 내게 물을 주는 시간이다. 나는 엄마처럼 호스트가 되는 걸 좋아했다. 어릴 적 꿈이 군인이었던 엄마, 내 상상 속에서 항상 당찼던 엄마는 사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서 무언가를 할 때는 긴장되고 떨린다고 했다. 무대공포증 역시 엄마를 닮았던 거다. 덜렁거리고 꼼꼼하지 못하고, 구기를 못하는 운동신경도 꼭 닮았다. 



예술가 가족이 부러웠다. 작가 가족, 미술가 가족, 음악가 가족, 재능이 DNA로 전해지고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하는 시간 자연스럽게 취미와 관심사를 나누게 되고 그런 주제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나누고, 나는 가질 수 없는 가족, 우리 가족은 날 절대 이해할 수 없고 우린 공동의 관심사를 가질 수 없는 말뿐인 가족이란 생각도 했었다. 왜 나는 이렇게 별난 거지.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저녁 식탁에 앉아 엄마는 국화꽃 향기를 읽었다. 류시화 시집을 읽었고 은희경 소설을 읽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토요명화극장을 꼭 비디오로 녹화해주고 한 편도 빠짐없이 내게 틀어주었다. 연령제한 영화도 내가 보고 싶다면 옆에서 함께 봐주었다. 그 덕에 20살이 되기 전 올드보이를 보고, 친구를 보았다. 만화를 보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고, 게임을 하는 내게 잔소리하지 않았다. 은비 까비의 옛날옛적에를 보고 징거미가 가재가 되는 일화를 내게 들려달라고 하고 소녀처럼 웃었다. 저녁나절 함께 산책을 했다. 안개가 깔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환상의 나라에 온 듯 하천 근처를 함께 걸었다. 



엄마는 DNA뿐 아니라 문화적 유산도 충분히 남겨주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별에서 온 괴짜가 아니라 엄마를 닮은 평범한 딸이었다. 그저 이런 좋은 기억을 돌아볼 틈 없이 잊고 살며 불만에 차있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늘 타이타닉을 보면서 같은 장면에서 여지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런 엄마가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어서 놀렸지만, 그래도 엄마는 로즈가 잭을 놓아주는 장면에서 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매번 타이타닉이 할 때마다 타이타닉은 다시 봐도 재밌다고 말했다. 요새 나는 싱어게인을 보며 운다. 재방송을 보다가도  같은 장면, 같은 노래를 들으면 또 눈시울이 붉어진다. 주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보며 우는 게 참 좋다. 역시 나는 엄마를 닮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은 무조건 쉽게 써야 답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