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윤 Feb 05. 2021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는 글

L군과 파트너이자 동반자로 지내며 기대치 않던 장점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나를 설명하거나 증명하는 상황이 닥칠 때 함께 고민해줄 동지이자 컨설턴트가 생긴다는 점이었다. 자기소개서를 검토해주거나 면접 방향을 고민하기도 하고 진로 고민 인간관계는 물론 업무 중 애로사항까지도 면밀히 세심하고 진심을 담아 효율적이고 객관적이고 실리적인 관점에서 나를 보완해준다. (편집증적 꼼꼼함은 지독하게 느껴지지만,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도움이 된다) 다른 컨설턴트보다도 훌륭한 지점은 훗날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연대 책임을 져준다는 데 있다.



L 군을 만나기 전 나이 많은 사람을 사귈 때조차 이상하게도 주로 나는 조언을 해주는 입장이 되곤 했다. 리포트나 과제를 도와주고 자기소개서에 대한 조언과 면접을 함께 준비해주기도 했다. 꼼꼼한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일과나 업무를 대신 챙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반대의 경우 그들의 조언이나 도움을 감히 구하지 못했는데, 그들보다 뛰어나거나 혼자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건 절대 아니고, 그들의 삶에 내 몫의 고민까지 함께해달라고 요구하기에는 그들 자신의 삶이 바빠 보였고 상대적으로 여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인간적 내면적으로 성장했을지라도 사회적 성취도 측면에서 가장 답이 없고 암담했던 시기, 형편없을 내리막 시기 얄궂게도 L 군을 만났다. 그전까지 내 마음 세계와 상관없이 내 몸 하나 건사하고 사회적으로 잘 작동하는 책임감 있는 어른이었지.



취업이 막막해서 매일 땅굴을 파며 자기혐오의 신세계를 써나갈 때, 만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던 L군은 동요 없이 인자한 미소로 내가 마주쳐야 할 현실을 하나하나 일러주며 해보자고 말해주었다. 그가 얄밉지 않았던 건 전적으로 옆에서 행동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으로 다정함은 태도가 아닌 행동에서 나오는구나 깨달았다. 더불어 살뜰히 자기소개서를 자기 일처럼 봐줄 때 전율을 느꼈다. ‘우와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돼?’ 이제까지 그런 역할은 내 몫이었고, 그 누구도 먹고사니즘의 무게를 기꺼이 덜어준 적 없었기 때문에 어색하면서도 퍽 감동적이었다.



그때 완성한 자기소개서는 홀로 머리 싸매고 썼던 글보다 훨씬 정돈된 느낌이 들어서 또 한 번 감탄했다. 특히 감정적이고 모호하며 큰 그림과 의미를 좋아하는 나와 달리 수치와 현실, 타당성, 객관적인 시선이라는 혼자서는 채울 수 없는 빈틈을 메꿔주는 측면에서 그는 훌륭한 파트너였다. 서로 다른 배경과 가치 시선을 가진 존재가 협업했을 때, 개선된 결과물이 나온다는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게슈탈트 이론을 몸소 체험한 셈이다. 그 이후 중요한 글을 쓰거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항상 L군의 조언을 구하게 되었다.




L군은 나를 만난 후 한 직장을 꾸준히 다녔고 사회적으로 자신을 증명할 일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아 내가 조언자나 컨설턴트가 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평소에 글을 즐겨 쓰지도 않는다. 며칠 전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나도 써본 적 없는 학업계획서를 써야 했고, 입학 접수 당시 언급도 없었던 자기소개서를 3일 만에 작성해야 했다. L군은 5년 넘게 그런 글을 쓸 필요가 없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알만하다.



그런데도 내심 똘똘이 L군 답게, 또 내게 조언을 해주는 날카로운 시선과 통찰을 지닌 L군을 기억하며 나와 다르지만 제법 훌륭한 글을 쓸 거라 상상했나보다. 아무리 초고라고 하지만 L군의 글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이걸 어디서 어떻게 손대서 고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건 한 편의 글이라기보다는 작업 설명서나 지시서에 가까웠다. 아무리 이과 계열이라고 해도 글에 알맹이나 의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잘 읽히지도 않는 글은 그동안 L군이 내게 베풀어준 은혜(?)와 애정을 곱씹으며 힘겹게 읽었다. 분명 생소한 전문 용어 탓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글이 읽히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L군을 옆에 앉히고 첫 페이지에서 네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두 시간 넘게 묻고 또 묻고 나서야 글을 어떤 방향으로 쓸 건지 정리를 했는데 진이 다 빠졌다. 고작 이거 쓰는 데 3시간이나 걸리다니 나머지를 언제 고치지. 이렇게 재미없는 글은 세상 오랜만이다.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로 ‘이상해! 내 글의 의도나 알맹이는 잘 고쳐줬잖아!’라고 항의하니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작가와 편집자는 다른 거야.’라고 대답했다. 속으로 그런가 그럴지도. 이상하다. 내가 아는 편집자들은 글도 잘 쓰던데. 그러나 세상에 내가 알지 못하는 편집자가 훨씬 많겠지. 그가 내게 베풀어 준 노력보다 덜하게 그 재미없는 학업계획서를 고치는 걸 꾹 참고 도와줬다. 썩 훌륭하진 않지만, 초고에 비하면 그래도 읽을 만한 글이 된 것 같아 괜히 뿌듯했다.



더 큰 시련은 갑자기 뜬금포로 등장한 자기소개서였다. 우리 둘 다 대체 왜 자기소개서가 필요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유양식에 자유 분량, 길고 지난한 학업계획서면 충분하지 않나? 이건 대체 얼마나 중요한 거지? 형식상 내는 건가? 행정팀의 미숙한 일 처리를 꼬투리 잡으며 어떤 의도로 써야 할지 모른 채 L군은 학업계획서보다 몇 배 고통스러워하며 자소서를 적었다. 어쨌든 자기소개서니 적어도 대략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얼마 전 내가 자기소개서로 고통받고 있을 때 L군은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줘! 라는 현자 같은 발언으로 날 구원한 적 있었다.



L군의 자기소개서를 읽고 학업계획서 때보다 더 암담해졌다. 그 글에는 사람이 없었다. 매뉴얼을 작성하거나 주체가 드러나지 않는 담백한 소개글은 누구보다도 잘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또 내가 좋아하는, L군의 모습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아 지나치게 깔끔하고 깨끗했다. AI가 행적을 조사해서 썼다고 해도 믿겠…. 아니 오히려 AI가 인간적인 자기소개서 쓰는 법을 배워서 썼으면 훨씬 L군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글 앞에서 ‘이건 아닌데.’라는 푸념 말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글에 나를 담지 않는 법을 몰랐다. 감정을 담고 내 흔적을 담지 않는 법을 몰랐다. 오히려 L군 같은 글을 쓸 수도 써본 적도 없다. 글이 너무 나 같아서 항상 문제가 되는 쪽이었지. 그런 양극단에 너무 자신이 담기지 않아 문제인 글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나를 썼는데 내가 담기지 않는 글이라니.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지? 머리가 멍했다.



고민 끝에 그 글과 상관없이 L군이 생각하는 너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새로 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보다 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곤란했는지 심지어 나 보러 대신 써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부렸다. 그럼 글이 너무 나 같아져서 그건 안 된다고 거절했다. 결국 원래 썼던 내용을 거의 다 들어내고, 글을 쓰기 전부터 여기서 담을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먼저 결정하고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다시 글을 썼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다지 마음에 쏙 들진 않았지만 (여전히 그 글에는 L군이 별로 담겨 있지 않지만) 처음 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선명해졌다.



나는 자주 세상이 나 같지 않다는 걸 잊는다.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현실적인 감각으로는 인지하지 못한다. 세상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걸 말로는 뱉어도 현재에 염두하고 살아가지는 못하는 자기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인 어린아이다. 어쩌면 그동안 내 취향의 글, 내가 좋아하는 글, 나와 공통점이 많아 공감하기 좋은 글 위주로 읽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L군을 생각함에도 내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부분들 공감할 수 있고 기억하고 싶은 부분들 위주로 L을 재구성해서 내 세계만의 L군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L군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없었고, L군의 글이 어떤지도 몰랐다. L군이 생각하는 L군이 어떤 사람인지 또한 목격한 적 없었다.



글은 말보다 한 사람을 잘 보여준다. 말은 휘발되지만, 글은 물리적으로 남는다. 앞뒤로 몇 번이고 놓치지 않고 읽고 검토하고 해석할 수 있다. 무형의 존재가 유형으로 그 순간 정립된다. 그러나 그게 곧 그 사람의 인간적인 색채가 담긴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글로 정리하며 존재를 덜어낼 수도 자신을 차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길 택할 수도 있다. 그런 자신을 골라내고 말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곧 그 글이 그 사람의 전부도 그 사람의 특징도 그 사람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내 글이 그랬던 것처럼 L군도 나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처음보다 훨씬 밀도 있고 짜임새 있고 메시지가 있는 글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그 완성품은 나의 글과는 거리가 멀고, 내가 평소 알던 L군과도 거리감이 있다. 아마 어쩌면 타인이 또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가 보는 L군과는 무척 닮았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내가 다 알 수 없는 독자적인 L군만의 세계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글에는 그 사람이 담겨 있다. 내가 모르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덜어내는 방식으로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세계를 너무 좁히거나 내몰거나 단언하지는 말자. 글을 읽고 그를 단편적으로 재구성하지도 말자. 글만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L군을 절대 상상할 수 없기에. 또 서로의 관여에 세계는 얼마든지 넓어지고 멋져질 수도 있기에.    

매거진의 이전글 책연과 페소아 그리고 앨런 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