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광이랑 살면 일어나는 일
이 한 편의 코미디는 도토리묵에서부터 시작한다. 명상으로 시작한 아침, 우아하게 한 잔의 과일 티를 마시며 지적이고 열린 시민의식을 함양한 사람에 빙의하여 독서 모임을 무사히 마친 후, 고픈 배를 달래며 점심을 준비하려던 찰나 보고야 말았다, 일주일째 냉장고에 방치 중인 도토리묵! 엄마가 직접 쑤어 주신 국산 수제 100% 도토리묵, 이걸 또 버려야 하는 건가? 지금 당장 도토리묵을 먹으면 살릴 수 있을까? 그 순간 과부하에 전기선이 합선되어 불꽃이 일어나듯 지극히 평범했던 내 안에 심술 궂은 헐크가 깨어났다.
“아 너무 스트레스받아”
까칠 최고조의 상태로 냉장고에 숨이 죽어있던 깻잎을 씻기 시작했다. 이거 먹을 수 있는 거 맞나? 오늘 점심 메뉴는 불고기였다. 그런데 묵을 봐버린 순간, 예상에 없던 묵을 먹어야 하잖아. 묵 생각을 하니 지난번 먹다 남은 청경채 역시 냉장고에 남아있으며, 오이 세 개를 아직 손도 대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망했어! L군을 부르며 미친 사람처럼 말했다.
“망했어! 난 이 냉장고를 감당하지 못해. 이번 생은 끝이야. 끝장이라고. 또 다 버리게 될 거야. 먹지도 못하고 또 버리게 될 거라고!!”
“대체 뭐가 두려운 거야? 게다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건 나잖아.”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히스테리에 사로잡혀 울기 직전의 사람처럼 방언을 쏟았지만 L 군은 평온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데다가 내게 전혀 공감을 못 했다. 당연히 공감을 못 하지. 그렇지만 넌 아무것도 몰라.
간신히 억지로 부여잡은 마지막 멘탈은 L군의 도움으로 완성된 묵무침의 묵의 식감이 찰기 하나 없이 미끄러져 부서졌기 때문에, 즉 너무너무 맛이 없었기 때문에 폭발해버렸다. 자기 예언의 충족이랄까.
“맛없는 쓰레기를 만들어버렸어! 안 먹어. 나 안 해”
밥하다 말고 슬리퍼를 집어 던지고 소파에 누워 발길질하며 엉엉 울었다. 맛없어. 다 미워. 넌 내 마음 몰라. 울면서도 자신의 유치함과 비이성적인 땡깡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덫에 걸린 듯 목에 돌덩이가 걸려 막막하고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더 크게 나를 지배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건 내게 심각한 문제라고.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어낼 요량으로 소파에 누워 목이 쉬도록 울었다.
표면적으로 나는 사치에 겨워 울고 있었다. 엄마가 만날 때마다 내가 먹지 못할 정도로 많은 반찬과 식자재를 잔뜩 주며 행복해했고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든 받아오는 양을 줄이려고 거절과 부정의 말을 쏟았지만, 엄마에겐 별 소용없었고, L 군은 옆에서 사람 좋은 미소로 ‘주시면 다 먹어요.’ 넉살 좋게 받아치기 때문에 늘 승리자는 엄마였다.
언뜻 보면 버리는 식자재가 아까워서 환경파괴범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짐이라든가 상대적으로 식자재가 없어서 곤란한 사람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치르기 때문에 저러나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고 상당히 찌질하다.
정확한 원인은 내가 통제광이기 때문이고, 그 어떤 통제도 못 견디는 데다가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자각을 하는 순간 세상이 끝나버린 것만 같은 무력감에 휩싸이는 재질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모든 이성적인 퓨즈가 다 날아가 버리고 어린아이가 된다(회사를 그동안 어떻게 다녔지?). 상대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으나 엄마의 정성과 사랑은 어느덧 나의 냉장고와 식단을 강제로 통제하는 억압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원래 식단 계획을 망가뜨리고,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게 했으며, 유통기한이 짧은 음식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받아와 절대로 완수해낼 수 없는 고난도의 과제를 받아들인 꼴이었다.
건강하고 이성적인 L군 같은 인간이라면, ‘어머님이 이렇게 맛있는 걸 잔뜩 주시다니 너무 행복하고 맛있어!’하며 다 먹든 못 먹든 지금 눈앞에 놓인 음식을 즐겼겠지만, 잔뜩 꼬인 통제광으로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다. 요리와 냉장고 식자재 관리는 내 마음속에서 나의 담당이며, 이곳은 나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엄마 집에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 다녀온 지금, 밥을 먹을 때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시험에 드는 기분이 든다. 내가 원치 않는 반찬을 만들어 최대한 잔반을 줄여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며 외줄 타기를 하듯 식사를 하고 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기분이 들고 그럴 때마다 하나씩 해결하긴커녕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떠나고 싶다.
‘절인 고기 지겨워.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못 먹는다고. 떡볶이가 먹고 싶단 말이야.’
엄마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원격으로 나를 조종하고 있고, 통제광은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바에야 정신 나간 떼쟁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묵으로 시작한 통제광의 폭발은 지나친 눈물의 여파로 4시간의 낮잠을 기록하며 하루를 낭비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맛없는 묵무침은 모조리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했고, 점심 준비와 설거지는 L군 담당이 되었다. 퉁퉁 부은 눈과 목이 쉰 건 덤이었다.
너무 창피해서 글로 쓰지 않으려다가 다음번 통제광 모드가 발동할 때 이 글을 보면 좀 더 정신이 일찍 돌아올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희망으로 예방주사를 놓듯이 글로 남겨둔다. 절대 당신이 이해 못할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