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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Mar 16. 2021

인생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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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한 미지의 영혼이 그럭저럭 살아내도록 사용설명서를 고치고 또 고치는 퇴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몇십 년 혹은 백 년이 넘도록 한 권의 불완전한 설명서를 완성하는 일 아니 완성했나 싶어 손을 놓았다가도 추가해야 하거나 수정해야 할 일이 끝도 없이 생긴다. 그래서 일찍이 부처는 인생이 고통이라 한 것인가? 물론 현명한 사람들은 설명서를 쓰다가 일찌감치 손을 두고 때려치우기도 한다. 그까짓 것 딱히 쓸 필요 없이 그때그때 되는 대로 살다 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럭저럭 살아내지 않아도 큰 문제 따윈 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멋지고 간단한 방법을 일러준다 한들 대부분의 어리석은 인간이란 집필의 의지를 절대 꺾지 못하고 언젠간 완벽히 그 사용설명서를 써내 온전한 인생을 사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지만 만약 당신이 그들의 면전에 대고 그놈의 설명서는 이제 그만 쓰는 게 어떠냐고 우아하게 말해봤자 큰 모욕을 당한 듯이 마구 화를 내 거나 당신을 미친 사람 취급할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 설명서는 영원히 완성되지 못하고 온전한 삶을 사는 방법 따윈 어디에도 없다는 걸 죽기 전까지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채 늘 그렇게 한 영혼은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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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반길 만한 사실은 인간이란 종족은 글이라는 귀찮은 걸 굳이 발명해서 만나지 못하는 타인에게도 끊임없이 제 이야기를 떠벌리고 싶어 하는 자기애를 타고났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설명서를 통째로 직접적으로 읽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갈망을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듯한 요약본을 끊임없이 생산해 낸다. 물론 대부분의 아류 설명서는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고, 편집되어 있어 원본보다 과대평가되거나 아예 다른 책이 되고야 만다. 그 설명서는 일종의 위인전 필터가 모두 씌워져 있고, 많은 사람이 읽기 어려운 말로 이해하기 어렵게 쓸수록 꽤 괜찮은 대우를 받기도 한다. 그렇게 태어나보면 인생에 참고할 만한 설명서가 널려있단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하지만 안타깝게도 보통 한 영혼의 설명서는 다른 영혼과 완벽히 일치하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인스타그램 필터 못지않은 위인전 필터의 왜곡은 걸핏하면 열등감이나 불안을 생성해내며 세상을 더 엉망으로 만들고, 엉망이 된 세상에 사는 인간은 더 복잡하고 긴 설명서를 만들어 내야겠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한다. 거기서 현명한 사람은 세상이란 더럽게 복잡한 것이란 결론을 맺으며 그제야 설명서 쓰기를 멈추는 데 큰 혼란과 불안 속에 설명서를 포기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일단, 설명서를 베고 자거나 냄비 받침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매우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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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우 설명서 쓰기가 매우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누군가가 그런데도 설명서 없이 살 수는 없다고 결심할 때 일어난다. 그들은 다른 이의 설명서를 아무 생각 없이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인이 아무렇게 대충 휘갈겨 쓴 설명서 중 가장 화려하고 그럴듯한 표지, 보기 좋은 폰트, 가장 중요한 너무 두껍지 않은 분량, 길고 쌈빡한 제목을 지닌 것들 중 유명한 것으로 대충 고른 후, 자신의 설명서로 삼는다. 그들은 아주 멋진 설명서를 한 번에 지닌 자신을 뽐내도 좋다는 착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 그 설명서를 정독하는 법은 없다. 그건 매우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고른 설명서를 확신에 차 타인에게 거리낌 없이 추천해주곤 한다. 마치 자신이 직접 쓴 설명서처럼 어려운 말을 덧붙이는데 그럴 때마다 설명서는 더 난잡해져서 원본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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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설명서를 공유하는 집단이 한 번 생겨나면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하는 걸 질색하기 때문에 여기기서 그 설명서가 질병처럼 퍼지게 된다. 우연히 마주친 타인 역시 비슷한 설명서를 지니고 있는 걸 발견할 때마다 사람들은 매우 흡족해지며 기분이 좋아진다. 결국 그 엉터리 설명서는 현존하는 이 시대의 최고의 가치있는 무언가로 거듭난다. 흔히 지성이나 교양, 철학이라고 불리며 운이 아주 더러울 경우 진리로 불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안타깝게도 후대에 전해질 확률이 높은 설명서는 그것이 되며, 그 설명서의 생명은 무한대로 늘어나고 마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잘 써진 얇고 예쁜 설명서는 한참 동안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질긴 생명을 지니며 대부분의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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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쓸데없는 설명서 만들기는 그만큼 힘들고 괴롭다. 좋은 방법을 일러주겠다. 받아적도록. 되도록 만들지 말라. 설명서를 만들었다면 불태워버려라. 두 번 다시 설명서를 쓰지 말아라. 설명서 만들기로 인생을 허비할 바에는 차라리 초코케이크나 퍼먹는 편이 훨씬 인생에 이롭다.



06


안타깝게도 이 글을 쓴 필자만큼 설명서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또한 필자의 설명서의 한 부록에서 옮겨왔다. 이 설명서 또한 엉터리에 가깝다. 어차피 죽고 나면 누구에게도 쓰일 일 없는 설명서를 평생 쓰는 게 허무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설명서에 기댄 삶을 살고 있다. 어려운 일이 생겨 인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마다 가장 가까운 상황에 맞는 설명서 페이지를 뒤적이며 인생을 굴러가게 애쓰며 살고 있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재미삼아 이 전에 썼던 설명서를 참고해 새로 생겨난 문제에 해결책을 적용해봤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현상이 발생해 버렸다. 필자는 혼란스러워하며, '아! 인생에 설명서 따윈 없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 이건 필자 인생에서 떠올린 그나마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가 확실하다. 그러나 설명서에 대해 더 의심하는 건 더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무리 없이 작동할 새로운 설명서를 찾아내기로 했다. 필자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끌어올 만한 그럴듯한 참고 서적이 있나 마구 뒤적거리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설명서에서 제거될 이 생각이 꽤 멋지고 중대한 사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겉멋에 빠져 필자는 이렇게 또 데이터를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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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쓴 어떤 문장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는 대체 오늘 저녁 뭘 해먹어야 하냐는 물음이다. 아직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또한 어쩌다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설명서에 한 글자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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