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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Mar 25. 2021

편집은 집요한 일이에요.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외로운 일

우리는 모두 기억의 편집자이다. 하루를 경험한다고 해도 깨어 있는 16시간 남짓의 시간을 통으로 자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중 일부를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그중 일부에 관심을 지니고 집중하고 그중 일부를 포착해서 저장 기억으로 전달하고 그중 지극히 적은 일부를 반추하며 하루를 마무리 짓고는 이름을 붙인다. 그 하루의 기억은 특별해서 자주 꺼내 읽게 되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평범한 나날들은 책장에 꽂혀 다시 먼지만 쌓이게 된다. 그 하루의 기억이 책장 속에 묻혀 유물이 되는 게 애틋해지면 보통 글이 쓰고 싶어진다. 잊을 게 분명하고 잊고 싶지 않은 하루에 글을 쓴다.


글은 남지만, 말은 흩어진다. 그와 나눈 말 하나하나가 아쉬워 모조리 붙잡고 싶다. 쓰고 편집하고 쓰고 편집하고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그와 보낸 반짝거리는 시간을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겨우 말의 파편을 이어 편집을 할 뿐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루가 다시 밝았다. 라라 님을 만나는 날. 가장 공을 들이는 하루. 모든 에너지를 쏟아 전부 기억하고 싶은 하루.



라라 님은 어쩌다 보니 편집자가 되었다. 의외로 편집 일이 적성에 잘 맞는다고 했다. 요새는 일을 끝내고 또 끝내도 다음 일이 밀려들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가늠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매일의 비슷한 일상이 한 덩어리로 압축되어 일주일의 시간이 고작 하루가 되어버렸다고.



편집은 집요한 일이에요. 하나의 문장이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독자로서 책을 읽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다음을 읽는 데 무리는 없잖아요. 그렇지만 편집자는 그럴 수 없어요. 글 전부를 완전히 이해해서 통째로 소화해야 독자에게 제대로 소개할 수 있거든요.”


“아. 그러네요. 글을 쓸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전력을 다하지는 못하네요. 어떤 순간에는 몰입해서 마구 쓰다가 어떤 순간에는 힘이 빠져 놓게 되죠. 힘들면 좀 쉬기도 하고 안 써지면 묵혀 두기도 하고 다음에 쓰고 싶을 때 이어서 쓰면 되잖아요. 그런데 편집은 그럴 수가 없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유지해야 하는 일, 같은 강도와 집중력을 요구하는 아주 고된 일이네요. 전 못할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편집자가 아주 외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작가와 독자가 한 편을 먹고 편집자는 따로 독립된 느낌이에요.”


“알 것 같아요. 작가나 독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의미로 채우면 되잖아요.”


“네! 물론 이렇게 읽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쓸 수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 작가는 독자 반응까지 일일이 고려하며 쓰지 않잖아요. 그보다는 자신의 세계와 언어가 우선이지. 또 독자는 자신의 경험으로 자신만의 해석을 하면 되고 그 이외 부분까지 고려할 필요 없죠. 그런데 편집자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야 하더라고요.”


“시야가 더 넓어야 하고 그 어느 단락 하나 소홀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편집일을 할 때만큼은 어느 때보다 온 힘을 다 쏟게 돼요. 일이 많을 때 사양 낮은 컴퓨터에서 무거운 프로그램 돌리는 것처럼 머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거에요. 진짜로! 정수리를 만져보면 엄청 뜨거워요! 배도 엄청 빨리 고프고.”



인생이란 편집은 직업이 아니다. 글을 쓴 작가도 없고 기억을 읽어주는 독자도 흔치 않다. 그러나 쓰는 행위는 기꺼이 하루와 기억의 편집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일이다. 좋은 편집자는 내 세계에만 갇혀있지 않는다. 시야를 넓히고 균형을 잡아 하루의 모든 시간을 쉬이 넘기거나 퉁쳐버리지 않는다. 고루 일정하게 경험한다. 하루의 시작되고 끝이 나는 때까지 언제 좋은 소재를 발견할지 모르니 깨어있어야 한다. 라라 님 말처럼 정수리에서 연기가 피어나도 모든 에너지를 끌어와 즐기는 거다. 이 하루는 한 번이기에. 기분대로 감정대로 의욕에 맞춰 충동적으로 사는 것도 좋지만 좀 더 뾰족한 편집을 하고 싶다면 차분한 마음으로 평범해 보이는 반복적인 일상에도 감각을 세울 줄 알아야 한다.



언젠가 라라 님은 일드 ‘중쇄를 찍자!’를 소개해준 적이 있다. 주인공인 코코로처럼 자신이 만드는 책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온전히 독자에게 전할 줄 아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삶은 외롭다. 자주 삶이 외로워 잠들고 싶을 때가 많았다. 되는대로 마구 편집하기도 했다. 꾸준하고 묵묵하게 편집을 해내기란 너무 외로운 일이니까. 편집은 고되고 누구 하나 도와줄 수 없고 홀로 끝까지 해내는 거란다. 그렇다. 원래 편집자는 외롭다. 그러나 삶을 사랑한다면 삶을 쓰고 싶다면 삶을 편집한다면 집요하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거다.


삶을 온전히 담아내는 반짝반짝한 글을 쓰기 위해서, 중판을 찍을만한 기억의 순간을 위해서, 사랑을 전하는 멋진 편집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삶보다 미약하지만 여전히 멋진 편집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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