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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pr 07. 2021

뱉으면 구현된다

오늘 라라 님이 집에 오셨다. 처음 본질대화클럽을 만들까 고민했을 , 아니 맘에 드는 거실 테이블을 발견했을  정다운 사람들과 오붓하게 모여 다과 시간을 보내면 좋지 않을까 막연히 꿈꾸었다. 1 멤버이자 유일한 멤버인 라라 님이 오셔서  번의 만남을 가졌으니 그때  꿈이 나도 모르게 이루어진 셈이다.


오시기 전까지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이제까지 대화의 연장선 정도라고 생각했다. 일정이 가득할 게 뻔한 라라 님이 굳이 수원으로 오겠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무리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라라 님이 흔쾌히 가입비를 내밀고 오늘이 우리의 본격적인 시작이자 선언이라고 말했을 때조차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지만 나는 그리 적었다. 숨겨진 의도는 있었지만, 표면적으로 글은 그렇게 적히고 그는 그것을 읽었고 바로 그것을 행했다. 이로써 다음 번 역시 예외는 없다. 절차가 생겼다. 그렇다면 상징을 떠나 실질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운명이다. 어릴 적 읽은 ‘치우천왕기’에서는 언어가 곧 마법이자 도술이었다. 말은 뱉은 이상 실행되어 현실이 되어버린다. 말의 힘은 비유가 아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 라라 님은 등 뒤로 내리쬐는 햇볕 공격에 거의 등짝을 그을릴 지경이었다. 연거푸 작두콩 차를 따라드려 자주 화장실에 가야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고 우리가 무얼 하는지 희미할 때가 많다. 그저 일상의 순간에 불과하다.


무엇이 될지 모른 채 쓰고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전부라고 말했다. 매끈함이나 노련함 같은 건 없고 스타일이란 미완성이고 무언가를 기획하고 쓸 수 없어 답답하다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의 산문은 시라고. 그게 산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마구 터져 나와 기록되는 건 결국 시 같은 거라고. 깎아내고 다듬어야 하는 엉성함과 거친 단면에서 배어 나오는 숨길 수 없는 미숙함. 그거야말로 에너지고 개성이라고. 무언가 확장되고 성장한다면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거라고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다고.


반쯤 벙어리가 되어, 할 말을 잃었다. 복잡한 심경을 풀어서 말하기란 불가능했다. 알고 있다. 우리는 생각했던 모든 걸 말할 수 없다. 말해주고 싶었던 모든 말을 다 기억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결코 나의 글에 독자가 될 수 없다. 글이 구분되는지 무슨 느낌을 줄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렇구나, 그래. 글은 늘 도중에 있다. 글을 쓰는 건 글의 도중을 보는 일이다. 영원히 글로 읽을 수 없는 거다.


삶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한 주제에 글만은 철저히 현재에 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도 모르겠고 미래에 이 글이 어떻게 쓰일지 의미가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오늘 생각이 나고 쓰고 싶고 쓰게 된다면 마구 쓰고 만다. 직감과 영감에 의존한 나의 이야기만 쓸 수 있다. 이건 재능이 아닌 미숙하고 어리석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단계에서만 겁 없이 뱉을 수 있는 글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 과정을 훅 건너뛸 수는 없다. 그 과정을 통과한 후, 돌아봤을 때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메타버스가 주류가 되는 세계가 온다 해도 별수 없다. 무슨 소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뭐가 될지도 모른 채 그저 써버릴 수밖에. 나는 말을 뱉었고 이것은 시작되어버렸고 끝나기까지 그 누구도 이게 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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