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윤 Apr 04. 2021

잊고 있던 데미안을 찾아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외롭고 고독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는 나와 한순간에 분리되고 말았다.


날 감싸 안고 있던 순진하고 따뜻하고 안락했던 세계와 분리되었으나 독립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온몸으로 취약성이 드러났다. 늘 거기 있었지만 이전까지 문제 되지 않던 사소하고 당연한 결점과 나약함이었다. 그러나 세계와 분리된 순간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존재의 고독 속에서는 내쉬는 숨 하나마다 우주의 진공 상태에서 직면하는 죽음의 전조가 뒤따랐다. 죽음은 필연적이었다. 죽지 않을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내 던지고 싶었다. 당장 저 세계에 속할 수만 있다면 나 자신의 모습 같은 건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모든 걸 부정할 수 있었다. 다시 외롭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단순한 읽기의 즐거움을 제외하면 내 생애 처음 영혼에 울림을 주었던 첫 독서의 대상은 ‘데미안’이었다. 그 기억은 어떤 왜곡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더 일찍 어린왕자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혹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감동적이게 읽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책들은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와 닮은 속성을 조금 발견하고 전율에 몸이 떨려와도 그건 결코 내 이야기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 시절 나의 이야기였고, 처음 외부에서 발견한 나의 이야기였다. 데미안을 선두로 나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슬픔과 기쁨을 깨달았다. 외롭지 않아 다행인 동시에 이런 슬픔과 외로움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는 건 절망이었다. 그렇다면 세계는 부조리하고 엉망이다. 다른 이들에 대한 경의와 지독한 절망이 나를 감쌌다.


해설지는 필요 없었고, 비평은 가당치 않았다. 경험해본 적 없지만, 난 단번에 그 책이 말하는 내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건져 올려 기억하지 못할 무의식에 잘 묻어두었다. 세상이 뭐라고 떠들어도 너는 너로 향해 나아가는 걸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그게 네 숙명이라고. 네 운명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이 지닌 위험성과 그 과정에서 겪게 될 혼란과 좌절까지 새겨두진 못했다.


17년이 지났고 나는 데미안을 완전히 잊었다. 또 그 세계를 잃었고 내가 새겨 놓은 메시지를 송두리째 묻어두고 살았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자면 나는 다시 공동체 속으로 밝은 세계로 편입되고 싶어 꽤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왔다. 깨어진 그 세계를 놓아버리고 새로운 운명에 용감하게 성큼성큼 걸으면서도 이전의 세계를 곁눈질로 동경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내 모든 것을 다 희생해버려도 좋았다. 다시 그들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다시 나를 모두 잊을 수 있다면.


그러나 이미 세계는 깨어졌다. 깨진 세계는 붙지 못하고 새는 알로 돌아갈 수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절망과 외로움에 지쳐 운명을 저주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기꺼이 고독을 택했다. 세세한 부분은 모두 내어주었지만, 비밀스럽고 내밀한 곳 가득히 데미안을 닮은 나만의 신이 최후에 나를 이끌었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탐하지 말고 너 자신이 되어라. 그게 지독하게 외롭고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 시절 데미안은 빛이고 동경이고 위로이고 나의 종교였다. 데미안은 나의 구도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 구도자를 떠나보내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하나뿐인 길을 걸어가야 했을 뿐이다. 이제까지 돌아갈 수 있는 집을 찾고 있었는데 다시 데미안을 읽으며 다짐했다. 고독과 외로움을 겁내지 말자고. 타협의 길을 가려고 억지로 애쓰지 말자고. 이제는 운명이 날 사랑하는 걸 알고 있다. 오늘의 나의 꿈은 싱클레어처럼 데미안을 만나 서로 잠시나마 집이 되어주는 것이다. 어쩌면 데미안을 읽었던 날부터 나는 이것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Index


“순수한 연대는 아름다운 거야. 하지만 보이는 곳마다 도처에 만발하는 이런 것들은 전혀 연대가 아니야. 연대는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탄생하고, 한동안 세계를 바꿔놓을 수 있는 거야.

지금 연대로 보이는 것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해. 서로를 두려워해서 뭉치는 거거든. 사장은 사장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는 학자들끼리 말이야! 그들이 왜 두려워할까? 사람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삐걱댄다고 느낄 때 두려워져. 자기 자신을 전혀 모르겠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그런데 사회는 자신의 내면을 몰라서 두려운 자들로 이루어졌지!” -184p


“아무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러나 두 길이 친밀하게 마주치는 곳에서는 온 세계가 잠시나마 집처럼 느껴지죠.” -190p


“싱클레어. 당신은 아직 어린애로군요!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당신이 꿈꿨던 것처럼 완전히 당신 것이 된답니다. 당신이 변함없이 충실하다면.” -194p


오랫동안 고립되었던 나는, 완전한 고독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득한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행복한 사람들의 식탁이나 축복받은 이들의 축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타인들의 연대를 시샘하거나 향수를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차츰 ‘표식’을 단 자들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196p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은 과정의 연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