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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pr 11. 2021

글 쓰는 자아 찾기

“요즘 뭐해?”


흔히 묻는 말에 답하기가 퍽 곤란하다. 


“여전하지 뭐.” 혹은 “별 일 없죠.” 


고르고 고른 진실이란 아무 정보 없이 맥 빠지는 답이지만, 냉담한 표현이 아니라 이보다 나은 답을 해줄 순 없다. 1년 아니 1년 반 전부터 사소한 몇 가지 변화를 제외하고 나의 일상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그렇다면 대체 뭘 하고 살고 있나? 사람이 아무 일 없이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인정하고, 굳이 말해질 필요 없을 아무 대답이라도 해보자면, 내면을 탐색하고 글을 쓰며 관찰하는 자아 시점으로는 최소 하루 한 번 다채로운 기후를 경험하며 쉴 틈 없이 풍파에 적응하며 살고 있노라고 고백할 수 있겠다.


삶이 곧 글이고, 글이 곧 인생이라 믿지만, 도무지 어떤 자아 혹은 자아의 어떤 영역이 글을 쓰고자 하는지 명쾌한 해답을 지니지 못했다. 굳이 명쾌한 해답을 지녀야 하냐고 묻자면 역시나 그 또한 별 볼 일 없는 거적때기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우연히 알게 되는 재밌는 현상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건 인생 최대의 기쁨이자 놀이이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니 꼭 붙들고 기억해서 텍스트로 저장을 해 두어야 직성이 풀린다.



머리가 맑고 긍정적이며 햇빛과 온갖 초록색을 사랑하고, 고요하고 고독하지만, 세상과의 단절 같은 건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평온하고 천진난만한 자아, 대부분의 글을 쓸 때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자아는 그런 자아이다. 그 자아는 언제 발동되느냐, 날씨가 좋고 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는 등 이동한 후에 나타나며 일상과 완전히 분리된 곳에서 조용한 한 때를 평온하게 즐긴 후 그 자아는 빼꼼 고개를 내민다. 걔는 세상 무서울 거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아직 미움이나 시샘을 배우지 못한 바보이고 봄이 사계절 내내 지속할 거라 믿는 순진한 아이다.


작업실 같은 건 가져본 적 없고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글을 쓸 때 또, 무언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을 할 때도 집을 이용하며, 꽤 집중을 잘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깨달은 바는 글을 쓰고 싶다면 주기적인 환기가 필요하단 사실이다.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글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생활 공간에 머물러 벗어나지 않고는 그 자아가 도저히 깨어나지 않는다. 아니 생활밀착형 에세이나 일기를 끄적이고 내면세계나 자신에 대해서 주저리 떠드는 주제에 일상과의 분리가 필수적이라니 이거 참 부조리하다.


하지만, 핑계가 아니라 관찰하다 보면 밥 해 먹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잠자는 생활의 연장 속에서 멈춰서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객관화하기란 쉽지 않다. 주로 일상이 지겨워질 때는 아예 자아를 잊을 수 있는 바보상자의 도움을 받는다. 그 정도로 큰 자극을 제외하고 일상을 제쳐 둘 순 없다. 또 쓴다는 건 편파적일지라도 일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 시선으로 해석본을 조심스럽게 꺼내 드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속의 일부로 그 일을 완전히 해내기란 무척이나 힘이 든다.


글을 계속 쓰고 싶다면 글 쓰는 자아를 때때로 불러낼 수 있어야 하고, 그 아이를 불러내고 싶다면 일상과 분리된 새로운 공간에서 햇볕을 쬐며 평온을 누려야만 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그 아이의 쌍둥이 격인 슬픔과 분노 불안에 가득 찬 글 쓰는 자아가 등장하겠지만, 다시 또 그 아이를 불러내 학대할 마음은 없다. 분노와 슬픔이 담긴 글일지라도 친절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햇볕을 좋아하는 그 아이와 동행하는 게 나의 몫이다.




많은 생애에 걸쳐 자아를 통합하려 애를 썼고 일관성을 지니려 투쟁했다. 그 통합의 일환으로 글쓰기를 시작했고, 삶과 글은 역시나 분리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한 관점으로만 이해할 수 없고 렌즈로 초점을 맞추듯 하나씩 관찰하고 집중한 후에야 글로 풀어낼 수 있기에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 위해서라도 낯설고 이질적인 관점을 하나씩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해낼 수 없는 그 작업은 잠깐은 어지럽게 흩어지더라도 결국 글에는 그 사람의 자아이니 인생이니 변할 수 없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라 통합의 걱정 따윈 버려두어도 무해하다.


참고로 일상적인 자아는 굉장히 게으르며 한없이 늘어지는 관성적인 나무늘보 같은 아이인데, 어느 상황이건 일상으로 확정되는 순간 그 아이는 여지없이 튀어나오며 그 아이는 글이고 타인이고 관계이고 세상이고 자신의 건강이곤 아무런 관심이 없다. 아이는 단순하며 감정적이고 생물학적이며 기계적이다. 에너지가 모자라고 세상에 위협이나 협박을 당했을 때조차도 숨을 쉬고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는 건 고맙게도 그 아이 덕분이라 절대 그 아이를 내 인생에서 밀어내거나 업신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상적인 자아나 글을 쓰는 자아는 하나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낮과 밤과 같다. 그런데도 낮을 낮이라 굳이 구분하고 밤을 밤이라 불러주는 것처럼 단절과 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한 이해의 한 단면으로서 또 앞으로의 글 작업을 위해서 그 아이 둘을 떼어내 불러주는 건 내게 상당히 유용하고 재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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