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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pr 27. 2021

보여줄 게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어?

영화 '버닝'리뷰




종수와 해미는 일정한 직장이 없다. 종수는 배달 일을 하고 해미는 나레이터 모델이다. 하루 벌어하루 산다. 오늘은 일하고 내일을 논다.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걸 해야 할지도 모른다. 종수는 소설가 지망생이라 말했지만, 소설을 쓰지 않는다. 사실 쓰고 싶은 소설이 뭔지도 모르겠다. 종수에게 세상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장소다. 이룬 게 없는데 믿을 수 있는 게 있나? 세상은 미스테리하고 불분명한 곳이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외치기도 무언가를 원하기도 힘이 든다. 생동감 없이 하루하루 지나쳐 사는 삶, 방향이란 게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디론가 가고 싶다고 생각조차 대책 없이 할 수 있는 것일까?


갑자기 나타난 해미는 인파 속 종수를 본다. 그리고 부른다, ‘이종수!’ 주변부에서 나를 특정해주는 존재, 해미는 말한다. 나레이터 일이 좋다고. 몸 쓰는 일이 좋고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게 좋다고. 내일은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해미와 종수의 처지는 다르지 않고 미래도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지만, 해미는 종수와 다르게 산다. 해미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삶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고자 애쓰는 존재이다. 세상은 해미에게 'little hunger'나 하라고 말하지만 해미는 'great hunger'가 되고 싶다.


미래도 현재도 보잘것없고 대책 같은 건 없다. 그렇지만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나라는 존재를 찾고 싶어.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배고프더라도 대책 없이 밝게 웃고 싶어. 아무리 당신 눈에는 한심하더라도. 아무리 내 처지가 변하는 게 없다 하더라도 나는 나를 믿고 싶어.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귤을 까먹는다.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 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것도 없어도 간절히 믿으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잊을 수 있고, 마치 그게 있는 것처럼 살 수 있는 사람. 자신을 잊어서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종수에게 해미는 빛이다. 종수 삶에서 종수를 발견해주는 누군가, 비슷한 처지에서도 생동감을 잃지 않고 삶에 의문을 던지고 솔직하고 마음 가는 대로 사는 해미. 불안 속 곧 지쳐 깨어질 것 같더라도 다르게 살고자 애쓰는 해미. 자유로운 듯 춤추다가도 사라지고 싶다고 울어 젖히는 바보 같은 해미. 하고 싶은 걸 해야 할 처지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는 해미, 사실은 위태로우면서 괜찮은 척 살아가는 해미.




그러나, 벤에게 해미는 그저 흥미로운 요깃거리에 불과하다. 벤은 실제로 가진 게 많고 있는 게 많은 사람이지만, 해미는 없는데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열을 다하는 말에도 그는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한다. 재미없으면 언제든지 갈아 끼우면 되는 부품일 뿐이다. 그는 매너 좋게 겉으론 친절과 호의를 베풀지만, 진정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존중 진심 같은 건 없다. 그에게 관계는 재미의 문제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지니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엔 믿음 따윈 없다.


세상일이 노는 거 같고 애초부터 편하고 쉬운 그에게 아등바등 불안에 떨며 방황하는 청춘들은 재밌고 하찮다. 태생부터 남다른 DNA 그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이다. 그들은 그의 부와 여유를 동경하고 겉모습에 참 쉽게 현혹되면서도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다. 조금만 자극해도 자신을 부정하고 무너뜨리고 아파하고 불안에 떤다. 벤은 판단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바람이 불 듯 물이 흐르듯 본래 모습대로 망가지고 절망하고 사라지고 싶다면 그렇게 되도록 놓아둘 뿐.


종수는 벤에게 대놓고 반감을 나타낼 수 없었다. 뜻 모를 거북감과 열등감과 분노를 느껴도 굽히고 침묵하는 이유는 벤과 달리 자신이 이룬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여줄 게 없고 증명한 게 없기 때문에 벤의 앞에서는 어떠한 믿음도 의문이나 어린아이의 치기가 되어버리고, 조용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고양이는 본 적 없지만, 고양이는 있었다.
우물은 다들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마른 우물이 하나 있었다.
세상은 그녀를 폄하했지만, 씨발 난 해미를 사랑한다고!



‘난 해미를 사랑하고 있어요. 씨발 난 해미를 사랑한다고.’


삭이고 삭이다 폭발하듯 건넨 한마디를 벤은 비웃는다.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말뿐이다.


종수는 해미를 믿었을까? 아니 종수는 종수 자신을 믿었을까? 아니, 세상은 수수께끼니까. 빌어먹을 한국에는 벤 같은 개츠비 들이 잔뜩 사는데, 뭔가 뒤가 구리거나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한데 어떻게 저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고 난 그들이 되는 법을 모르겠다. 그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고, 포르쉐를 끌고 좋은 집에 사는 건 벤이니 어떻게 종수가 자신을, 사랑을 그리고 해미를 믿을 수 있겠어? 이렇게 이루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 답답해 터져 나갈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이 선택은 모두 내가 한 것이다. 모든 건 내 잘못인 것만 같아 원망할 대상도 뚜렷한 명분도 없다. 그러나 억울해 미치겠다. 이건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해.



사랑하는 해미가 사라지고 나서야 간절히 해미를 찾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후에야 종수는 엉터리 세상에서 답도 주지 않고 자신을 비웃는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나하나 찾고, 하나씩 시작했다. 소설을 쓰고 해미의 집에서 자위하고, 벤을 사라지게 한다.


벤에게 해미는 아니 벤에게 해미와 종수는 사회에서 사라져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일지 망정 서로에게는 살아 숨 쉬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수는 해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해미가 사라진 걸 모르거나 부정해도 그만은 확실히 안다. 해미가 사라졌고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이제껏 살던 것처럼 모호하기 때문에 막막하기 때문에 또 가진 게 없기 때문에 가만히 입 다물고 앉아 있을 수 없다.


혜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종수는 벤의 말처럼 불처럼 타오르게 되었지만, 종수의 믿음이 있는 한, 그 대상은 종수가 아닌 벤이다.




믿음이 없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어? 믿음이 없이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고? 이뤄놓은 게 없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어? 보여줄 게 없는데 어떻게 바보처럼 믿을 수 있냐고? 믿으면 세상이 비웃을 거고, 무시할 거고, 결국 무너져버릴 거야. 그렇지만 믿지 않으면 원래 세상에 없던 것처럼 사라져버려.


청춘은 하나도 아름다울 게 없다. 무력함과 답답함 속 사라지고 싶다가도 사라지지 않고 싶은 복잡한 심경이 영화를 보고 난 한참 뒤에도 날 떠나지 않았다. 나는 믿을 수 있나? 나 역시 믿을 수 없을 때 착잡하고 슬퍼지는 거 아닐까? 종수와 내 모습이 겹쳐서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말했다.


‘시발, 난 해미를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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