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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Nov 07. 2021

다시 쓴다.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건 이것 뿐

실로 오랜만에 몸 안에 쓰지 못하고 휘발될까 좀이 쑤실 만큼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목도한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분명히 이 글도 처음의 의도와는 다른 내용으로 둔갑하고 말겠지만 나는 이제 생각을 멈춘다. 논리도 의미도 멈춘다. 무언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 느낌이 살아있음이고 이것은 언제나 나를 구원해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란 이토록 오만하고 이기적이다. 난 기본적으로 타인이 내 글을 어떻게 읽을까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꿰뚫어 보거나 정확히 공감한 상대방을 만나는 건 그 누구보다도 기쁘고 신기한 일이다. 


나는 약 두 달 전 인스타그램을 지워버렸다. 조용히 어플을 지웠어도 아무도 모르겠지만, 거기다가 출사표를 던지듯이 마치 엄청난 의식을 거행하는 듯 메시지를 남기고 온 나를 스스로도 유별나다 생각했다. 그땐 다시 외부 자극에 끌려가고 시달리던 시기였다. 그 안에서 중심을 잡을 여력이 없었으며 그때 쓰는 글이나 생각은 의미가 없거나 솔직하지 않게 느껴졌다. 아니, 자아에 끄달려 자아를 잃은 나는 그 어떤 것도 쓰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상태가 된다.


조금 다른 이유이기 하지만 브런치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관심이 있거나 내 글을 읽어 온 사람이라면 내가 꽤 오랜 시간 글을 쓰지 않고 있단 걸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진정 나의 자아에 의문을 갖게 되었고 자아를 표출하는 행위 자체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에도 의문은 있었다. 이 글이 대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 건가? 이게 무슨 효용이 있지? 이래서는 읽기 괜찮은 글이 아닌데. 그러나 그건 세상과의 연결에 대한 고민이었지. 글에 지독하게 나를 담아내는 행위에 관해서 한 번의 의문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받아줄까 이해할까는 고민이 되어도, 글에 나를 표현하는 방식은 내게는 언제나 옳았고 자연스럽고 즐거운 행위였다. 


물론 자기밖에 모르는 주제에 성찰이라는 걸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빠져있는 내가 지독하게 이기적이란 생각을 했으나 세상 사람들이 굳이 피해보는 게 아니라면 난 언제나 나를 듬뿍 담은 글을 쓰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달 전쯤, 난 누구에게도 나를 보여주기도 표현하기도 싫어졌다. 과거엔 특정 누군가가 없어도 언젠가 미래의 누군가나 열린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이런 나를 보고 조금의 흥미를 가질 거란 가정을 지니고 그래도 언제나 내 생각이나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것들에 관해 말하기를 즐겼다면 그때는 모든 확성기를 다 꺼버리고 싶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껴도 단지 나 혼자 알고 있는 걸로 충분했고 나를 이해시키거나 표현하는 모든 행위가 전부 부질없고 피곤하고 바보마냥 느껴졌다. 내가 왜 세상 친절하게 나를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세상은 내게 관심도 없고 이건 그저 한 때 순간 생명체의 찰나의 삶에 불과한데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인가.


물론 이 모든 생각은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의식적인 나는 그저 평온하고 안정적이고 굳건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저 무기력하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데 그다지 우울해 하지도 딱히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이 이상한 기 현상을 해석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한 마디로 친절한 척, 고상한 척, 잘 숨기던 자아비대증이 너무 커지다 못해 폭발해서 이제 이 고상하고 이기적인 자아는 현실과의 모든 연결을 거부하기로 선언해버린 것이다. 아주 오만하게도 이건 세상에 대한 내 선물이다. 하찮고 알아봐주지도 않을 글들을 이제 난 쓰지 조차 않을 거야. 이건 나 혼자 영원히 간직할 거라고. 


이렇게 적어 두고 보면 정말 정신이상자의 사고회로와 비슷하다. 다시 읽으며 언제라도 자아가 폭발할 지점 스스로가 부끄러워 정신을 차릴 지도 모를 일이지. 


이렇게 글을 쓰고 다시 표현하고 싶어진 건 이 자아와의 공존 방법을 다시 내가 찾아냈기 때문이다. 또 이건 내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놀이이다. 아직 이것 만큼 재밌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살려면 써야 한다. 그냥 뭐 아무거나 쓰는 거 말고 나를 써야 한다. 


무언가 다시 글을 쓰면서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써야 해. 객관적으로 납득이 가고 지식이 있거나 논리적으로 빈약하지 않은 글을 써야 해. 그게 아니라면 객관적으로 재미라도 있던가 말이지. 그러나 그것도 그냥 다 자아가 시킨 거다. 좀 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그 오만한 자아가 말이지. 걘 언제나 자기가 작아질까 봐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쫄보이다.


예전에 걔를 사랑하는 건 부둥부둥해주고 최대한 감정에 거슬리지 않은 환경에다 놔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게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망상에 빠져 있을 때 호되게 현실을 보여주는 것. 자신의 객관적 입지를 점검시켜주는 것. 그리고 미안하지만 네가 내 주인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것. 그럼에도 걔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안고 사는 것. 그게 사랑이다. 정신차려. 이제 여긴(나) 네 거 아니야. 


다시 쓴다. 그때도 솔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보면 그건 또 완전히 솔직한 건 아니었다. 뭐 솔직한 게 중요한 것 또한 아니다. 쓰고 싶은 대로 쓴다. 지금 이걸 쓴 건 자아다. 걘 자기에 대해서쓰는 걸 좋아한다. 됐어. 뭘 또 준비하고 재고 뭘 또 더 알아내야 해. 네가 쓰고 싶은 건 이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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