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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Nov 02. 2021

복종과 신

완전히 삶에 복종한다.



언제나 삶의 목적이 궁금했다. 고작 대충 능력대로 먹고 사는 하찮은 세속적 일과가 삶의 목적 일리 없어. 아니, 살기 위해서 목적이 필요했다. 아무 것도 파괴된 적 없는데도 내면의 불안과 사고방식 만으로도 삶이 갈려나가는 상황을 손도 쓰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이상했다. 일상적으로는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왜 모든 게 변해버렸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내 물음에 제대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이게 최대치의 조언이었다.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때 난 우월감에 젖어있었다. 내가 한 차원 더 높거나 적어도 더 깊은 남들은 생각 못하는 중요한 문제에 골몰하고 있다는 우월감. 어렴풋이 깨달았다. 흔히 눈에 보이는 행복은 아무 것도 보장해주지 못할 거라는 거. 잠깐은 기분이야 좋겠지만 언제라도 이런 복잡한 사고가 안에서 전쟁처럼 벌어지면 아무 소용 없이 쑥대밭이 되어버리는 걸. 그게 답은 아니었기에 내 인생은 그게 아닌 다른 답을 찾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삶에서 신을 찾은 적 없었다. 어떤 종교도 믿은 적 없었다. 이유 없는 복종도 이유 있는 복종도 싫었다. 누군가에게 희생당하거나 누군가 짜 놓은 틀에 맞춰 살아야 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나를 지켜야 했고 그게 늘 최우선 과제였다. '자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때조차 내겐 자유가 언제나 우선순위였다.


어쩌면 글은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끊임없이 자유롭고 진정한 나를 찾아헤맸다. 주체성, 독립성, 자율성, 자유, 생각, 감정을 샅샅이 해부하면서. 그러나 나는 몰랐다. 그것 또한 세속의 성공 기준을 따르는 것만큼 허망하고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불확실하고 우월한 관념 찾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잠깐은 평화로웠다. 아주 잠깐은 깨어 있기도 했다. 그 평화가 좋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거긴 사랑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그 상태를 잊을까 조금은 늘 두려웠다.


나는 그렇게 지키고 알기 위해 노력해 온 내가 진정 아무 것도 아닌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허무주의로의 귀결도 회의주의자가 되는 뜻도 아니었다. 나는 자신을 잃는 게 뭔지 알고 싶으면서도 사실은 조금이라도 나 자신을 놓칠까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산다'는 그 말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살기 위해서 나는 내가 무언가를 더 알아내고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삶을 알지 못했다.



드물게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순간과 관계가 자연스럽게 나를 사랑과 충만함으로 이끌었다. 내가 아닌, 나의 목적이 아닌, 그 순간 상대를 바라보고 집중하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음에 기쁨과 사랑이 흘러넘친다면, 삶도 마찬가지다. 과거도 미래도 어떤 일도 에고의 요구에 희생시킬 필요 없이 그저 그 순간에 집중하면 그게 사는 거고 그게 삶이라는 걸. 나는 죽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복종이란 단어는 내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나는 절대로 나를 포기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제 책을 한글자씩 천천히 읽고 사유하며 비로소 내가 찾던 게 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란 거. 나는 그저 이미 나라는 걸.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사는 거. 나는 삶에 바짝 엎드려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기쁨과 평화를 알게 되었다. 꽂꽂이 세워둔 허리를 바짝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나는 현재 있음에 경배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허무하지 않은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일이 벌어진다해도 왜냐고 묻지 않고 그 순간에 나를 일치시켜 완전히 나를 없애버리는 것 나는 그것을 하지 못했기에 언제나 괴로웠다.



나는 늘 물었다. 이 글을 쓰는 건 누구인지, 나의 생각 덩어리인지 진정한 나인지. 아마도 대부분의 나날엔 나의 생각과 자아였겠지만, 드물게도 어떤 목적도 걱정도 없이 오로지 글에 빠져 글을 썼던 그 날에는 아마 진짜 내가 글에 흘러들었을 것이다. 진정한 나라는 건 어떻게든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언어를 능가하고 관념과는 아무 관련없는 현상태의 빈공간과 고요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체험되는 의식일 뿐이다. 어쩌면 이 말도 내가 책에서 보고 공감했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걸 명확히 표현해내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을 떠올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변치않는 궁극의 목적, 절대적인 목적, 다행히 그건 있었다. 나는 그걸 찾았다. 다만 그것이 내가 찾던 범위 내에서 없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완전히 신을 믿는다. 아니 내 안에 신성을 일 깨우는 거 외 내 삶의 목적이란 없다. 그러나 그건 종교와도 교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비로소 삶에 대한 저항을 멈춘다. 나를 세우고 지키려는 그 헛된 에고를 버린다.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 언제나 이 곳, 이 공간으로 돌아와. 목적도 형태도 자아는 언제나 변해. 거기 너무 집착하지 마.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목적을 이루든 그건 상대적이고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야. 지금 이 순간을 깨어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길을 잃고 울고 있고 문을 닫고 있는 날에도 태어날 때부터 나였던 의식은 아무런 판단도 동요도 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건 누가 없앨 수도 없다. 내가 마주보지 않는 날조차. 그걸 삶에서 깨닫는 거 그게 나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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