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윤 Nov 08. 2021

어쩌면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영혼이 진정 원하는 것

어제는 지금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아무런 불만도 걱정도 없는 이 상태가 행복하지만, 원하는 게 딱히 없는 목표 없는 이 상태로 사는 게 괜찮은 건 지 의문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Astin은 이 외부 균형 상태란 어차피 영원하지 못하며 어딘가에서 불만이나 결핍이 생기고 그렇다면 욕구는 자연스럽게 생길 거라고 말했다. 또한, 크고 장기적인 목표를 찾는 게 희미해서 그렇지 작고 단기적인 목표를 하나하나 찾아내면 중간 다리를 건너 더 큰 목표를 찾아낼 거라고도 조언해주었다.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지만, 왠지 그가 내 고민을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럼에도 그의 답은 내게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


계속 책만 읽고 있는 건 내게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늘은 왠지 리얼리티 트랜서핑을 오랜만에 읽고 싶어졌다. 처음 그 책을 읽고 싶었던 건 자아에 관해서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할지 단서를 모으려는 목적에 가까웠다.


아래 문장이 적힌 페이지에 내가 그려놓은 강조의 별 표시를 발견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그건 내가 조금도 변한 게 없다는 의미인 동시에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게 보내는 분명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 문장을 읽고 마음이 살짝 쿵-하고 떨어진 걸 보면 뼈를 맞은 게 분명했다.



파괴적인 펜듈럼의 영향력을 벗어나면 당신은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목표가 없는 자유는 유보상태이다. (중략) 걱정거리는 갈수록 적어지지만 그와 함께 욕구 또한 사라진다. 외부세계의 압박은 약해지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별 득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줄어들지만 새로운 성취도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인간세상은 온통 펜듈럼 위에 건설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펜듈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면 그는 사막 속에 남게 될 것이다. 유보상태는 펜듈럼에 묶여서 사는 것보다 크게 나을 게 없다. 예컨대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이는 우울하게 야위어간다. ‘더 이상 원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85-86p 리얼리티 트랜서핑 1



책을 계속 읽다가 책에서 마주친 예시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없을 것 같던 하나의 명제를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일기장을 펴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많은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어떤 목적이 있는 건 아니야. 나는 단지 그들을 알고 싶어. 또 그 순간을 통해 받을 느낌을 수집하고 싶어.’


그건 새로운 생각이자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서 그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는 데 소름이 돋았다. 저 시나리오가 진정 내 영혼이 원하는 거라면 이제까지 나는 반대로 행동해 온 거 아닌가.



나는 인생에서 여러 번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모조리 끊다시피 하고 고독의 세계로 숨어서 내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걸 질색한다. 나는 새로운 단체나 커뮤니티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이탈하곤 했다. 나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지니고 있다. 나는 고립에 익숙한 인간이며, 소속감에 대한 결핍을 언제나 느끼고 살며 좁은 인맥과 원활하지 않은 인간관계에 콤플렉스를 지닌 자아를 가졌다.



그러나 동시에 내 인생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며 해준 조언들 중 가장 마음 깊숙이 꽂혀 들어온 말 혹은 행동은 모두 이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너무 자신에게 함몰되지 말고 외부 세계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이건 고등학교 은사님이 내게 해 준 조언이다. 그는 내가 회계사가 되길 바랐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회계사가 되지 않은 건 잘한 일이다.


“외로운 사주니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한다.”
이건 그 당시 사귄 남자 친구가 원해서 처음 가 본 사주카페 역설가가 내게 해 준 조언이다.

전학 가기 전까지 내게 누군가를 만나는 건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곳은 작은 촌동네였고 보수적인 동네였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은 내게 큰 상처와 두려움을 남겼고, 과거의 기억과 감정은 유사한 상황에서 비슷한 대처와 사고방식을 만들어 결국엔 인간관계 콤플렉스가 강력한 인간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미움받거나 거부당할까 봐 극도로 두려워해서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는 걸 선택하곤 했다.


20대 초반, 나에게 ‘넌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에서 크나큰 기쁨을 얻을 수 있어.’라고 조언해줘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거다. 그러나 내게도 귀인을 만난 듯 이런 영혼을 기쁘게 하는 순간들이 있었기에 저런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음에도 간간히 귀한 인연들을 만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들을 만난 순간만큼은 처음에는 경계했을지언정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내게 진심이란 걸 알게 된 후에는 원하는 것도 계산도 없이 모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사랑의 힘은 강력하여 강한 자의식과 콤플렉스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망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겐 언제나 내가 진심이라면 진심인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 만남이 아주 잠시와 찰나의 순간이라도 언제나 그 만남은 의미 있고 가치 있다 라는 신념을 품고 살게 만들었다.



거의 대부분 내게도 진심인 사람이 많이 다가왔다(물론 대부분은 내게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인생 초기 나 역시 가끔은 계산적이거나 다른 목적이 있거나 그의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나를 이상화하거나 조종하려고 하는 사람도 만난 적 있다. 그러나 그들과의 만남 후에도 한 번 울고 슬퍼할지 언정 그것으로 인해 만남이나 관계의 의미가 희석된 적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다른 일에는 그토록 과거를 상기하며 고통에 갇히는 자아가 그일 만큼은 홀로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자 배움을 남긴 사건으로 가볍게 지나치게 허용했다. 신기하게도 생각해보면 나는 진정으로 그들을 미워한 적이 없다. 그들의 상황이 안타까웠지.



내 인생에서 일어난 행운과 마법은 모두 사람과 관계 속에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 나는 가치 있는 귀한 인연을 아주 우연히, 전혀 힘들이지 않고 만났다. 언제나 그 기회를 놓친 적 없었다. 재밌는 건 전혀 내가 외향적으로 분류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고 낯을 가리며 화술이 뛰어나지 않고 소심해 보인다. 한 무리의 사람이 있을 때 거의 대부분 나는 그들과 섞이지 못했다.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풍부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행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사람이 마음을 열고 있어 그런 귀한 인연을 만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늘 마음이 쓰이고 귀찮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사람’이란 일관성이 있었다. 심리학을 택한 이유는 나 자신을 알고 싶은 동시에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었다. 스팀잇에 빠졌던 것도 인스타 계정을 운영하다가 결국엔 고물다방을 열고 본질대화클럽을 만들려고 마음먹은 것도 결국 사람을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소년에서 3시간 왕복 출퇴근에도 그렇게 즐거워했던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모두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그건 사람이다.



모르겠다고 했지만 언제나 늘 알고 있었잖아. 어쩌면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