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만 해도 어쩌다 삶이 이 지경에 이른 걸까 담담하게 지난 삶을 회고했다. 기나긴 무기력을 보이는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여러 모로 노력한 끝에 거기에 동반하는 감정이 예전만큼 짙진 않았다. 가슴을 날카롭게 훑고 다시 순식간에 그 기억을 무한하게 소환하며 사는 프로메테우스가 될 필요까진 없었다. 연민을 품지 않고 비열한 입꼬리를 올리지 않은 채 조용하고 담담한 관찰자 시점에서 머무르려고 노력했다.
의도가 어떠하든 잘잘못을 떠나서 이 삶을 만든 건 나이기 때문에 유체이탈 화법으로 삶을 사는 건 불가능했다. 이 삶을 책임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삶을 책임지는 데 영 재주가 없어 보였다. 사실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는 게 편하고 빠르고 효율적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마 여기에서 도망가면 난 망각의 강에서 모든 기억을 다 잊고 다시 처음부터 이번 생에서 내가 선택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반복적인 삶을 살 게 뻔했다. 아니 어쩌면 과제 난이도는 더 높아지고 불안이나 강박 하나를 더하는 꼴일지도 모른다. 영혼의 삶에서는 모든 것은 영원하다. 지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몇 번의 삶을 반복한들 받아들일 리 없다. 나는 결국 하나이다. 물론 과거의 기억은 없지만 이번 생에서 난 그 가설에 동의하며 살고 있다.
어쨌든 도망치고 싶으나 도망칠 순 없고 책임지는 걸 잘하지 못하나 책임은 져야 하니 결론은 자명했다. 싹 다 바꿔버려야 그나마 사람 구실 하며 살 수 있다. 잘못된 방식이 있다면 하나씩 고쳐서 개선하는 게 바람직했다. 한 번에 다 바꿔버리면 좋겠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고 그렇게 몰아세우면 좌절할지도 모른다. 나의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나(모두에게나 미덕은 있다) 그럴 때는 장점 같은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이 모조리 다 틀려 먹었고 나는 어디서부터 이 삶에 손을 대야 좋을지 알 수 없으나 항복할 수도 없다. 그리고 당연히 이 모든 건 내 책임이었기에 실소가 나왔다.
어제까지 망해서 희망 없는 삶의 내용이란 대략 이러했다. 나는 영혼과 내면세계에 집착하느라 삶을 경시하며 살았다. 나는 집에 갇혀서 시간 낭비 중이다. 나는 화초 3개를 죽이고 있고 은연중에 그들이 말라죽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지 2주가 넘었다. 무언가를 챙겨 먹기도 몸을 운동시키기도 귀찮다. 나는 고립되어 있고 예전 날 기쁘게 했던 것들을 해봐도 더 이상 어떠한 기쁨도 느낄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괴로움도 고통도 날 괴롭히는 상황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 몇 가지 치명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빼고 뭐든 중간 이상은 잘할 자신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만이 많고 오만하던 나는 그 일들은 다 내 것이 아니고 고작 그런 일을 하며 살기엔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꼈기에 이제는 내게 일을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도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증명한 게 별로 없고 경험 또한 많지 않은 데 나이만 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 삶이 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일 당장 이유는 모르지만 새로운 열정과 정념에 휩싸여 활기차게 살아도 놀라울 건 없다. 다만 어쩌다 보니 2021년 11월 절망과 고통 없이도 깊은 무기력에 적응해서 삶이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데 이게 좀 지겨운 쳇바퀴처럼 느껴지고 있으며 이 전에 해온 선택이 대부분 어리석거나 무의미해 보이는데 이 삶을 타파하려면 내 모든 걸 다 바꿔 새 사람이 되는 수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알다시피 거기엔 많은 노력과 고통과 저항이 따른다. 본격적으로 시작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나는 나를 이 삶에서 어떻게 구출해줘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물론 누워서 베개를 베고 편안한 상태로 주로 낮잠에 빠져들면서 쉬엄쉬엄.
현실의 측면에서는 내가 원하는 게 뭔 지 정확히 모르나 영혼의 측면에서는 분명 내가 원하는 것과 지금의 삶이 상당한 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현실의 삶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현실의 삶은 모조리 잘못되었고 나를 미워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내 영혼을 충족시키기에는 모자라고 부족한 인간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를 내 삶을 정화, 치유, 개선하기 위해 뭘 할 것이지? 모르겠다. 뭘 할 수 있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순식간에 내 삶이 평화롭고 온전하고 행복하고 충만하다고 느낀다. 이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실상 세상 밖에 요구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아무것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다른 사람이 될 필요도 다른 의식과 다른 루틴을 만드는 것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결국 이렇게 정리하면 관점과 태도의 차이일 뿐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지고 말 것이다. 그게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불충분하다.
나는 숫하게 이 기나긴 무기력한 시절에도 내 삶에서 좋은 것을 찾아보고 감사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생명에 감사했지만 어제까지는 별 소용이 없었다. 당연히 외부 환경이 변하거나 사건이 벌어진 건 아니다. 물론 책을 읽긴 했으나 어제까지 그 책은 내게 두통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집 밖에 나가는 행동이 환기의 역할을 했다는 걸 완전히 부정할 수 없으나 이 상태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 잠이나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굳이 말로 설명하자면 영혼이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자각이 한순간 들었다. 내가 이번 생의 과제를 잘 해내기 위해서 애써 노력할 필요도 나의 어떤 부분을 억지로 바꿔서 다른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는 걸. 이제까지 내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쳇바퀴 같은 형벌로 느껴지는 방황도 무지도 그 길의 일부라는 걸 오랜만에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인간인 내게는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은 사랑의 일부라 겁낼 필요 없지만 두려움에 점령당하면 사랑을 잊게 된다. 어떤 삶을 살아도 결국엔 나는 내 삶을 살 것이다. 아주 어리석게 느껴지고 후퇴하는 결과를 낳는 것 같아 보이는 선택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헤매든 결국 내가 원하는 길에 도달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영혼은 영원하고 나를 사랑하며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열심히 영혼에 마음에 들려고 길을 다 설계할 필요도 무언가 내가 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아 고작 언어로 이렇게 정리될 뿐이라니 다음에 길을 잃고 두려움과 어둠에 휩싸였을 때 이 정도 묘사로 지금의 감각이 돌아올지 모르겠다.
영혼이 맑게 비치면 모든 건 다 해결된다. 일상의 루틴도 돌아오고 자비로운 마음도 열정도 사랑도 돌아온다. 형편없이 글러먹은 인생은 순식간에 축복받고 아름다운 삶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알고 만나고 체험하는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