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도록 행복을 좇았다. 보름달을 보며 비밀스럽게 소원을 빌 때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망 하나를 크게 외칠 기회 앞에서도 나의 소원은 늘 같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삶이 어떻게 변화하든 먼 미래에도 항상 행복하게 해 주세요.”
행복에 관한 정의와 철학,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은 지구 상에 수만큼 다를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행복에 관한 생각을 열거할 예정이다. 이건 분명 주관적이고 개인적 측면에서 분명한 진실이다. 설사 내가 모든 걸 표현하고 당신이 모든 걸 완전히 이해했다 하더라도 내 진실이 당신의 진실이 될 수 없음을 안다. 만약 당신이 행복에 대해 관심이 있고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글이 행복에 대한 견해와 실제적으로 당신이 행복을 느끼는 과정에 조금이나마 실마리나 자극이 되길 바란다.
아직 내가 깨어나기 전, 본격적으로 내가 누구이고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크게 의문이 없던 시절 나 역시 자동적으로 행복에 관해 이런 견지를 지녔던 것 같다. 물리적 세계에서 사건이 벌어진 후 나의 해석에 따라 주관적인 행복의 여부가 결정되었다. 행복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내게 생긴 어떤 사건이 내게 기쁨, 설렘, 만족스러움, 기대감을 느끼게 했다면 나는 행복했다. 반대로 그 사건이 나를 울게 하거나 무섭게 하거나 화나게 하면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내가 행복할 자격이 있는지 불행할 운명이 있는지 2차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바다로 휴가를 떠나 처음 보는 친구와 모래성을 쌓으면 행복했고 내가 하지 않은 일로 오해를 받아 벌을 설 때면 슬펐지만 행복은 순간적이었다.
행복이 좋았고 행복하고 싶었지만 불행하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행복해지려면 행복한 일이 생겨야 한다고 당연히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땐 어느 정도 나의 노력이나 행동에 따라서 행복이 더 많이 만들어진다고 인과 법칙처럼 생각했다. 나는 분명 외부에 반응하는 수동적인 존재였고, 행복해지기 위한 앞 단계로 외부적 사건이 필요했으나 행동을 조절하고 선택하는 방식으로 행복에 대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관점에서 정리해보면 행복해지고 싶다면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외부적인 사건을 최대한 많이 만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었다.
모든 게 단순하고 희망적인 시절이었다. 내게 좋은 일 행복한 일이 생기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불행해도 순간을 지나면 또 언젠간 행복한 일이 찾아올 것이다.
예기치 않은 긴 고통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을 때 행복에 관한 나의 관점은 크게 바뀐다. 갑자기 난데없이 내 관점에서는 어떤 인과 법칙도 없이 랜덤으로 내게 고통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그 고통과 불행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건을 없애버려야 했다.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나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때서야 처음으로 세상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게 인생이었다. 그리고 내 잘못이 아닌 일이 나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사건을 벗어나도 나도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리적인 조건이 완화되어도 내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내 삶을 방해했다. 나는 처음으로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은 필터 같았다. 필터는 전반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관점이 날 지배한 이후로 좀처럼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처음 마음을 만들어 낸 계기는 분명 사건이었지만 이상하게 사건이 사라졌는데 필터는 영구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마음이 한 번 깨지면 아무리 붙여봐도 예전과 같은 원본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단 걸 발견했다. 나는 예전처럼 단순히 물리적인 사건에 있는 그대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건보다 중요한 건 필터였다.
내가 만든 마음의 필터, 마음의 렌즈에 따라 세상을 해석하는 존재였다. 나는 극심한 절망감을 느꼈다. 한 번 만든 필터는 아무리 애써도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내가 만든 필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한 가지 관점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관점이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특정 사건이 벌어진다고 꼭 특정한 감정을 느끼지도 않고 사건의 여파 또한 사람마다 달랐다. 나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있던 나의 형제에게 그 일은 별다른 타격감이 없었다. 나는 이런 필터를 만든 나를 자책했다. 또 이 필터를 갈아 끼울 수 없는 나를 저주했다.
나는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였다. 세상 모든 이와는 이별해도 세상의 사건은 달라져도 나의 예민하고 부정적이고 소심하고 우울한 필터는 영원할 것이다. 어떤 좋은 일이 생긴다 한들 이 필터를 끼고 보는 한 나는 다시 고통으로 접어들 것이다. 이 필터를 버리기 전까지 난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할 것 같았다. 이 삶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죽음 만이 날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것 같았다.
이 시절 내게 행복이란 행복한 필터를 손상시키지 않는 자만 얻을 수 있는 동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타고난 필터가 강력하고 두꺼워서 웬만한 사건에도 깨지지 않은 강한 멘탈을 소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 같았다. 그리고 살면서 영원히 그 행복해질 수 있는 필터를 유지하는 게 행복해지는 삶의 방식이라 믿어졌다. 나의 필터를 속이며 행복한 척 행복한 일을 만들어도 밤에 혼자 남아 내 필터는 불행을 말했다. 순간이나마 행복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이 깨질까 봐 두려웠고 우울하고 불만족스러운 사건이 생길 때는 그럼 그렇지 자기 확증적 증오와 혐오를 했다.
한 번 행복의 필터가 깨진 사람은 어떻게 필터를 갈아 끼우거나 조금이나마 단단한 필터를 만들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내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삶의 과제는 어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복원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었다. 그 시절 내가 느끼는 행복의 가치는 주관적인 안정감이었다. 그리고 타고난 민감성과 너무 많이 느껴지는 내 안의 감정들은 행복을 방해하는 주요 장애물이었다. 높은 파도를 어떻게 잠재워야 할 지 나는 알 수 없었고 작은 바람에도 나는 남보다 더 격하게 삐끗했다.
그 시절 현실에 적응해서 잘 지내다가도 나의 마음을 지나치게 훼손해서 견디지 못할 일이 생기면 나는 즉각 그 환경에서 멀어지는 쪽을 택했다. 자책의 마음이 반은 있었지만 나를 보호해 주겠다는 우선순위가 확실했다. 돈도 성공도 인정도 내 마음의 안정감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나는 내 마음을 면밀히 조사하고 관찰하고 살폈다. 내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 버틸 수 없는지 어떤 종류의 것을 못 견뎌하는지 어떤 관계를 참아낼 수 없는지 경계선을 일일이 확인하는 게 내 삶의 주요 내용이었다. 가끔씩 임계치를 돌파하는 사건이 생기면 모든 걸 미뤄둔 채 회복하는 데 집중했고 다시는 그런 상황에 나를 두지 않았다. 나는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내가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다.
다행히 마음은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과민함이 수그러들고 참을성이 많아졌다. 행복은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일과 관계 환경을 구축하고 얼마나 그 마음의 범위를 넓혀 갈 수 있는 가에 따라 달렸다. 나는 삶을 알수록 또 나를 더 잘 이해할수록 점진적으로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오랜 시간 아주 오래 이 상태에서 행복을 정의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행복은 어찌 보면 치열했고 주관적이지만 여전히 조건적이었다. 마음을 차분히 유지하기란 죽을 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약 3년 전쯤 다시 행복에 관해 획기적으로 변화를 맞이한다. 그건 마음과 감정이 내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책의 내용을 읽으면서 시작했다. 생각도 마음도 감정도 내가 아니라고? 그것들은 그저 왔다 가는 것이라고? 이제까지 내가 파악하고자 했던 내면세계란 사실 생각과 마음과 감정에 가까웠다. 나는 거기서 어떤 나만의 일관적인 규칙을 찾고 그것들이 별 탈 없이 무사히 돌아가길 바랐다. 그리고 그럴수록 내가 그것들을 통제할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걸 발견하고 삶은 원래 행복할 수 없고 행복은 찰나라고 타협해왔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그 변덕스러운 생각, 감정, 마음, 아니 무엇보다도 마음의 필터가 나 자신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행복에 관한 새로운 희망이 생겨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행복은 사실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너무 글이 길어졌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더 얘기하겠다.
앞서 삶을 살아온 지혜로운 모든 선각자들의 의견을 취합하면 행복에는 시공간이 필요 없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상태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행동을 하고 그 행동에 따라 발생하는 감정을 해석해서 행복이란 결과물이 생기는 건 아주 부수적인 작용이다. 그런 행복은 상대적이고 변덕스럽지만 사실 행복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다. 내가 행복하다는 자각을 하기만 한다면 그건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
이 삶은 허구이고 드라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 안에 고요히 변하지 않고 누가 와도 깨트릴 수 없는 한 존재가 영원히 살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 그 순간 나는 바로 행복의 상태가 된다. 나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르고 신성이라고 부른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특히 인간이라면 모두 신성이 깃들어 있고 그 즉시 자각할 수 있다. 조용한 공간에서 눈을 감고 현실의 모든 문제와 감정을 벗어던지고 호흡에 집중한다. 어느 순간 시간이 지나는 것도 느껴지지 않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별 반 느껴지지 않는다. 호흡의 숨에 따라 손을 느끼고 정수리를 느끼며 생명의 에너지가 숨 쉬는 걸 바로 느낄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원하면 즉시 생명력을 자각할 수 있다. 이건 살아 숨 쉬는 동안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느끼고 이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현실을 부정할 필요도 행복해지라고 강요할 필요도 행복하지 못하다고 자책감 가질 필요도 없다. 그건 모두 생각과 감정과 마음의 차원의 일이다. 그건 행복에 대한 강박이다. 그러나 행복한 상태에 접어드는 자각을 경험한다면 거기에 진정한 내가 있다는 걸 체험한다면 행복은 무조건적이고 영원하다. 어떤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다고 해도 내 안에 깃든 영혼과 생명을 느끼는 그 순간에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 그 어떤 행복해지기 위해 선행될 조건도 필요 없고 그 행복을 대가로 다음 순간 더 불행해지지도 않는다.
마음의 필터가 약해도 어두워도 부정적이어도 상관없다. 행복한 상태를 체험한다면 그것을 인정하기는 한결 쉬워지고 그게 나를 규정짓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행복의 상태에 계속 머물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필터를 갈아 끼우게 된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고 싶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물론 나는 선각자도 성인도 아니기에 이런 행복의 상태를 경험하고 난 후에도 외부에 끄달린다. 현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건이 생기고 그 드라마에 휘말린다. 감정이 발생하고 폭풍이 몰아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잊는다. 행복의 상태에 머물지 못하고 어쩌면 오랫동안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가지 못해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그곳을 향한다. 내 삶은 그곳을 향하는 여정이다.
이 행복의 상태를 오래 지속한다면 거기에 파생되어 내 감정이 사건을 끌어당기고 사람을 끌어당기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해 내가 추가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행복을 위해 채워야 하는 부족한 부분은 없다. 나는 자각이 있는 한 항상 생명력이 깃든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떤 일 때문에 또 나의 단단한 마음 덕분에 행복한 결과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나는 존재로서 행복한 상태이기 때문에 행복을 세상에 반영한다.
이게 현재까지 내가 찾은 행복에 대한 철학이자 행복법이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 삶을 바쳐도 좋다고 몇 번이나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기도를 올렸다. 나의 기도는 이루어졌다. 나는 절대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행복한 상태를 알게 되었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삶으로 끌어오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나 행복한 상태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행복한 존재라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안다. 마음이 복잡하고 감정의 파고가 높은 내가 여기 이를 수 있으니 그 누구라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