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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Dec 20. 2021

옷장 정리를 하며 알게 된 것들

빨래를 자주 하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 그거 세탁기가 다 해주는 데 뭐 그리 귀찮냐고 묻는다면, 빨래가 끝난 후 건조기에 넣을 수 없는 옷을 팡팡 털어 너는 것도 귀찮고, 다 마른 옷을 개고 차곡차곡 정리해서 제자리에 두는 게 그렇게 귀찮을 수 없다. 최대한 늦출 수 있을 만큼 빨래를 미루다 보면 어젯밤처럼 수건이 없다는 걸 오밤중에 깨닫게 되는 불상사를 겪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정갈한 마음으로 빨래를 하고 건조대의 옷을 정리하다가 문득 어지럽혀 있는 나의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물건의 자리를 정해둔다. 무엇이든 쓰고 나면 제자리에 두기 때문에 어지럽지 않다. 그의 옷장도 예외가 아니라서 계절별 종류별로 옷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한눈에 보기 편하다. 


반면 나의 경우, 처음에는 깔끔하게 정리하지만 사용하면서 경계가 흐려진다. 귀찮을 때마다 대충 접다 만 티셔츠와 니트가 섞여 영역이 흐려진다. 이사 오고 난 후, 옷 정리를 해두지 않아 계절도 혼종, 옷 종류로 마구 섞여 있다. 그러다 보면 눈에 띄는 옷만 자주 입게 된다. 옷장만 봐도 혼란해지기 때문에 얼른 옷을 갈아 입고 도망치듯 방을 쏙 빠져나온다. 




'그래, 계속 도망칠 수 없지.' 비장한 마음으로 옷장 정리를 시작한다. 가장 먼저 옷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더 이상 입을 수 없어 버릴 옷, 입는 옷, 잘 입지 않지만 왠지 필요할 것 같아 버리기 애매한 옷. 세 번째 경우에는 1년 정도 유예 기간을 준다. 그리고도 한 번도 입지 않게 된다면 그때 미련 없이 버리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계절별로 종류별로 모아 정리를 했다. 단지, 평소에 귀찮아서 설렁설렁 접어 던져버린 옷을 정성 들여 신경을 써서 옷걸이에 걸고 접은 것뿐인데 옷장이 한층 깔끔해졌다. 작업을 끝내니 3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지만. 



내 옷장에 이런 옷이 있었나? 이미 기억에서 잊은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다시 입어보니 여전히 제법 잘 어울린다. 또, 옷장 구석에서 내내 찾다가 사라져 버려 포기했던 두터운 겨울 양말과 내의를 발견해서 보물이라도 찾은 기분이다. 어떤 옷은 그때는 맞으나 지금은 틀렸다. 더 이상 몸에 맞지 않거나 너무 짧고 너무 꽉 낀다. 





옷장 정리를 수월하게 만드는 건 오래 입을 옷만 구매하는 거다. 옷을 오래 입기 위해서는 신중한 쇼핑이 필요하다. 내 몸에도 잘 맞고 좋아할 수 있는 옷을 골라야 한다. 거기다가 활용도가 높은 옷이라면 금상첨화이다. 



어릴 땐 옷 고르는 방법을 몰라서 쇼핑이 두려웠고 내가 옷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땐 내게 어떤 옷이 잘 어울리는지도 몰랐기에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내게 어울리지도 않는 유행하는 옷을 장만했으나 영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1년도 되지 않아 안 입는 옷이 되어 버렸다. 엄마와 쇼핑을 가게 되면 무언가 맘에 걸리는 옷을 강제로 사버리고는 옷장에 박아 두기도 했다. 종업원이 옆에서 친절하게 이것저것 추천해주고 너무 잘 어울린다고 말하면 왠지 눈치가 보여 옷을 사게 되고 그게 부담스러워서 아예 옷을 사러 가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한눈에 안다. 쓰윽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옷이 내 스타일인지, 내가 좋아할 만한 옷인지. 소재, 소매 길이나 밑위길이, 핏, 디테일한 디자인 등 조금이라도 걸리는 게 있으면 전체적으로 맘에 들어도 사지 않는다. 어차피 그게 걸려서 잘 입지 않게 될 테니까. 어떤 옷이 유행하는지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내 몸에 잘 맞는 옷과 그건 별 개의 이야기니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누가 추천을 하거나 잘 어울린다고 말해도 맘에 들지 않으면 'No'라고 말한다. (물론 여전히 인터넷에서 산 옷이 생각과 달라 실패하기도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건 고민 없는 반품이다)



무채색의 무난하고 얌전한 옷도 있지만 옷장을 바라보니 색깔도 문양도 꽤 화려하다. 이건 과거 패션에 관심이 많던 전 남친의 흔적이다. 그는 내가 절대 안 어울릴 거라 생각해서 평소 절대 입지 못할 과감한 옷 스타일을 시도해보라고 독려해주었다. 그 덕분에 내가 생각보다 강한 원색과 화려한 패턴이 그려진 옷을 좋아하고 잘 소화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해 주었다. 몇몇 옷은 너무 부담스러워서 이미 옷장을 떠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 덕에 내가 고려하는 옷의 범위는 넓어졌다. 



여전히 내 옷장을 일부분 차지하고 있지만 거의 안 입고 앞으로도 안 입을 것 같지만 버릴 수 없는 옷도 있다. 이건 엄마가 준 옷이다. 사이즈도 맞고 용도도 분명해서 버리면 낭비이지만, 역시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걸 사며 나를 떠올렸을 엄마의 애정을 떠올리면 쉽사리 버릴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건 '지금' 입을 옷만 골라두는 거다. 과거엔 옷이 맞았는데 혹은 미래엔 혹시 모른다며 지금 입을 수 없는 옷을 묵혀 두는 건 객기다. 몸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춰 옷을 다시 사면 된다. '혹시나', '언젠가'는 옷장에 옷은 많은데 입을 옷은 없는 풍요 속의 빈곤을 양산할 뿐이다. 





옷장을 모두 정리하고 보니 생각보다 지닌 옷이 많았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어쩌다가 그 옷을 사게 되었는지 저마다의 사연이 모두 기억이 나서 웃음이 나온다. 옷장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입어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옷을 신중히 사겠다고 결심한다. 오래오래 내 옷장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옷들로만. 또 그 사랑스러운 옷들에게 좀 더 귀한 대접을 해주자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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