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익숙하지 않은, 당연하지 않은 활동을 해 보는 게 어때? 너에게 책 읽고 글 쓰는 활동은 너무 당연한 거잖아."
미래에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면 L은 고민 없이 이런 조언을 해준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져 그 말이 한동안 기억 언저리에 남았다. 별 말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굉장한 말을 들은 듯 생소하고 낯선 말이 조심스럽게 스멀스멀 나를 관통하고 차지했다. 새해 아침이 되어 빈둥거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언제부터 읽고 쓰는 게 당연한 사람이 된 거지?'
신기하고 생소한 일이다.
살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쓴 시간을 모으면 얼마나 될까? 그건 수능 시험을 잘 보려고 투입한 시간보다도 취업하겠다고 자격증을 절실하게 준비한 시간보다도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데 공들인 시간보다 적을지도 모른다. 취업을 하고 나서는 읽고 쓰는 시간은 내 인생에서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누군가는 여행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던데, 몇 줄의 일기 쓸 체력도 없어서 여행지에서 하루를 보내면 잠에 빠져들기 바빴다.
그저 고등학교 때 한 두 달 열심히 블로그에 기록했던 기억이 마음이 심란하고 기댈 곳 없을 때 몇 달간 일기장에게 심정을 토로했던 그 기억이 나를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굳이 삶에서 무언가를 창작해야겠단 결심에는 경쟁 후보도 없이 글이 떠올랐다. 어딘가에서 글로 상을 받아 본 일도 크게 글을 잘 쓴다는 칭찬도 받아본 적 없고 함께 글을 써본 경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생에서 길을 잃고 방황할 때마다 손을 잡아주고 길을 이끌어준 소설 속 주인공과 삶으로 알게 된 모든 지혜를 풀어내며 내게 따뜻한 위로를 보태 준 작가들의 말에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에, 그들의 흔적으로 인생을 함께해서 조금 덜 외로웠기에, 가본 적 없는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날 그곳으로 이끈 이야기에 여러 번 감격했기 때문에, 그리 많은 책을 읽지 않았어도 내게 책이 주는 의미는 특별했다.
특별히 많이 읽지도 특별히 잘 쓰지도 매일 많이 쓰지도 않으면서 이런 소소한 계기와 기억은 나를 특별히 책을 읽는 걸 좋아하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건 또 어느새 다른 활동이 잦아들자 주변 사람과 내게 '읽고 쓰는 게 당연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했다. 지금은 내 안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결과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3~4년 전을 떠올려보면 내게 있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새삼 실감이 난다.
올 해가 된 김에 읽고 쓰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지 말자고 말해 본다. 이렇게 원하는 만큼 마음껏 읽을 수 있고, 이렇게 생각과 느낌을 글로 쓰는 건 크나큰 행운이고 기쁨이라고. 오래전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던 소망이 이루어졌는데도 오늘의 나는 당연함을 이유로 감사할 줄 몰랐다. 책을 읽다가 지루해져도 오늘 문장이 입 안에서만 웅얼거리더라도 작은 불만을 품는 대신 오늘의 읽고 씀에 환희하고 싶다. 읽고 쓰는 사람이라니! 그 어떤 수식어보다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