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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06. 2022

나이 드는 게 좋아

새해맞이, 변화한 나 자신 셀프칭찬

5개월 만에 만난 동생 S와 카페에 앉아 이런 얘기를 나눴다.


"얼른 80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그때 전 훨씬 더 멋질 것 아니에요."

"오. 나도 그래. 난 그래서 오늘의 내가 제일 좋아. 내가 알던 나중에 제일 지혜로우니까."



나이 드는 게 좋다. 물론 피부는 점점 건성화되고 체력은 떨어지고 위장 기능도 약해지고 몸은 여기저기 더 신경 쓰게 만들지만, 체력을 내줘도 좋을 만큼 지금의 변화가 만족스럽다. 타임머신이 있다 해도 지금의 기억과 의식이 보존되지 않는 한, 고작 젊어진다는 이유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꼭 성장하고 변화를 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삽질하며 여기까지 변화해 온 나를 격하게 칭찬해주고 싶다. 누군가는 지난해 자신의 부족하고 아쉬운 점을 반성하고 연초 새해 목표를 세워 격려하겠지만, 난 여기까지 정말 수고했고 대단하다는 글을 쓰고 싶다. 자기 성찰과 관찰은 평소 자주 하니, 오늘은 자아비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축복과 찬사를 쏟아내야지.


경험을 돌이켜보자면 그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나는 변했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좋아졌다. 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내가 더 좋아졌다. 오늘은 내가 밉고 야속해도 내일의 나는 이 부족한 점을 자양분 삼아 분명 한 발자국 더 전진할 테니. 나를 알아갈수록 새로운 면을 발견할수록 자아가 확장될수록 또 그게 전복됨을 알수록 나는 내가 좋아진다. 


그동안의 변화(내가 좋아하는)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게으른 완벽주의 퇴치 (지나치게 높은 자의식)


나는 통제광이자 완벽주의자였다.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으면 스스로 실망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시작도 하지 못했다. 실패하는 게 싫으니까. 누군가 앞에서 바보가 될까 봐 큰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 넘어지거나 뭐라도 입가에 묻히고 다니거나 게임에 걸려서 애교라도 부려야 할 때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치고 싶었다. 매사에 항상 심각하고 잔 걱정도 달고 살았다. 스스로에게 선이 많았다. '아, 나는 그런 거 못해...' 그래서 안전지대에서 머물기 위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었고-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모르는 사람들 틈에 휩싸이는 새 학기 새 학년이 되거나 각종 환경의 변화도 내겐 스트레스였다. 


방학에도 집에서만 칩거했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자리가 조금만 불편하면 곧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누군가 내게 간섭하는 게 싫었고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왈가불가하는 꼴도 싫었다. 나는 꽉 막히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면서 스스로에게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엽사가 찍혀도 뭘 묻히고 다녀도 무언가를 못하는 것으로 판명되어도 꽤나 괜찮다. 불리하면 친한 사람들에게 애교도 부린다. 내가 별로 완전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타인이 생각만큼 내게 관심이 많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타고난 성향인지 습관인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선을 넘어가려는 꼴을 보면 순간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가 내 글이나 단편적인 언행을 보고 평가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그렇게 판단하다고 내가 그런 사람임을 뜻하지 않기도 하고 그의 의견까지 통제할 자격은 없으니까 그 정도는 내려두어야 한다. 


또 원래 세상은 통제할 수 없고, 내게도 좋은 일이란 내 계획이나 생각과 상관없이 벌어지니까 딱히 걱정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도 한다. 그 순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도 나는 나를 달래는 주문을 알게 되었다. '고칠 수 있는 건 고치고 고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어.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예전에 비해 나는 낙천적이고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시도해보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게 관대해진 게 내 삶의 질을 높였다. 




2.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기


예전엔 내가 색도 없고 딱히 취향도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얼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고 무얼 좋아하는지 찾을 생각도 없었다. 내 욕망에 대해서도 솔직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착하고 남을 배려하는 거라고 나를 압제했을지도. 


지금은 활동을 하거나 누군가를 만날 때 언제 기뻐하는지 감각을 곤두세워 수집한다. 내가 어떤 물건을 보며 기뻐하고 어떤 장소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무엇을 할 때 활기차지고 어떤 장소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불편했는지. 판단하지 않고 선 긋지 않고 진심으로 날 속이지 않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살핀다.


그때에 비하면 난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하고, 헤르만 헤세와 페소아를 좋아하고, 어떤 스타일의 그림을 좋아하고 어떤 문체를 좋아하는지 어떤 관심사가 있는지 등등 훨씬 자세하게 나에 선호에 대해서 폭넓게 아카이브를 모아 왔다. 그리고 설사 취향이 없는 영역에 대해서도 그다지 당황해하지 않는다. 아직 몰라서 그러거나 정말 없다면 뭐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3. 자아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유연함


완벽주의자 기질과도 연관되어 있는데 살면서 가장 많이 해 온 질문과 내면의 활동은 자아 관념에 대한 생각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특성의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설명하기를 여전히 좋아하고 아마 앞으로도 좋아할 것이다. 최근 읽는 책에서는 고정된 자아 관념 같은 건 허상이고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계속 변화하고 유형화할 수 없으며 사람을 아는 방법은 사는 것 외에 없다지만 그 말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계속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고 더 많은 걸 알고 싶다. 그건 내게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니까. 자기 몰두를 포기할 수가 없다. 


그래도 예전엔 변화가 두렵고 일관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내게 수많은 편견을 주입시켜놓았다. 스스로 많은 선을 그어놓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둬 둔 셈이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바뀐 핵심 신념이 꽤나 많다. 예를 들자면, 한 때 나는 독신주의자였고 결혼은 나의 무덤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하는 결혼은 내가 만드는 거라서 더 행복 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결혼을 했다. 종교와 신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의 난 신을 믿게 되었다. 한 때 돈은 이기적이고 나쁜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지만 난 돈을 사랑하고 나의 풍요로움을 믿는다. 또 내가 절대 사업을 못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업자가 있고 사업을 해 볼 마음이 있다. 


나의 무의식 깊은 곳 가장 큰 두려움은 나를 잃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자아 관념에 대해 제동을 거는 사람들을 못 견뎌하고 분노했고 그들을 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변하고 어떤 특성과 습관을 지니더라도 영원히 나는 나일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오늘 한 말을 미래에 부정한다면 그건 내가 변덕스럽거나 줏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생각이 그렇게 변화했을 뿐이라는 걸 안다. 미래의 나는 오늘의 글을 보며 또 변해있을 것이다.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배신도 변절도 아니라 그저 그렇게 변화하고 확장된 거라는 걸 오늘의 나는 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의 내가 참 기대된다. 




4. 감정과의 거리두기


10대 시절 이후로 다시 정신과를 찾아 상담을 하거나 약을 찾을 정도로 만성적인 우울함을 아직 겪진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울증이 사라진 것도 아니며 감정 기복이 잦아든 것도 아니다. 단지 시간이 지나 경험을 많이 하면서 내 감정이 그렇게 무뎌지진 않은 것 같다. 여전히 난 기쁠 때 너무 기뻤다가 슬플 땐 너무 슬프다. 아주 슬플 땐 이 삶을 왜 살아야 하는 건지 묻고, 무기력할 땐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은 어둠 속에 잠겨 허우적거린다. 다만, 예전보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법을 조금씩 배운 기분이다. 


이제는 화가 날 때, 기분이 우울해질 때, 그것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법을 안다. 아주 즉시는 아니더라도 바로 화를 내거나 슬퍼하기보다는 내가 왜 화가 나고 슬프고 우울한 지를 생각해보게 되고 여러 가지로 내게 합당한 이유를 찾아준다. 설사 그 이유가 합리적이지 않고 성숙하지 못하고 과거와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나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다고. 마음껏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도록 놔둔다. 애써 거기서 꺼내봤자 기분은 가시지 않을 것이고, 기분이 우울한데 나까지 주는 압박으로 폭발할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을 둔다. 여전히 그 시간을 완전히 내가 조절할 수 없고 기분도 조절할 수 없지만, 스스로 감정을 놓아주는 법은 배운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어떤 기억과 감정은 새록새록 살아나서 나를 과거로 끌고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날 탓하지 않는다. 


감정을 없애지 않고 인정해주면서도 그것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기분이다. 이건 명상의 힘이 큰 것 같다. 내 감정은 일정하고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감정 표출은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안정적이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내 변화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 나만큼 내 변화를 실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건강하게 사랑할 줄 알게 되었고, 나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고, 그럼에도 이 모든 게 변화 거나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약점과 한계 역시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고 날 기다려주게 되었다. 그 변화들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여유를 지니고 주변 사람에게 더욱 관대해지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행동이 내 선호에 거슬려도 그만의 이유가 있겠다고 생각하고, 세상 모든 일이 날 겨냥하는 건 아니라고, 혹은 누가 내가 밉고 싫어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한들 그도 역시 나처럼 자신을 알아가며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이라는 걸 기억하면 연민을 지니게 된다. 


내년 이맘쯤 나는 나를 더 많이 알고, 좀 더 변화하고 확장하고 조금 더 나를 사랑하기를. 나는 내가 나이 드는 게 참 좋다. 삶은 인간이란 자아를 경험하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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