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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Feb 18. 2022

고마워요, 정신과 입원 경험

나를 치유한 건 그곳 생활이 주는 기쁨이었다.

당신의 기분이 상황에 좌우된다면, 당신은 결코 그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 자신의 기분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당신은 그 상황을 변화시킬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머니룰,  에스더 힉스 & 제리 힉스, 60p


이 구절을 읽다가 강렬한 '아하'의 순간이 왔다.


18살, 차라리 죽기로 결심했다. 누군가의 눈을 의식하는 것도 힘들어졌던 나는 눈치를 볼 여유도 사라져 하루 종일 엎드려 매일 울었다. 온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희망은 없었다. 설렘도 기쁨도 행복도. 고뇌와 고통 우울과 낙담 그곳에서 온 조용하고 깊은 절망이 나를 덮쳤다.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었다. 내 삶에 기대할 것도 바라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살, 1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순식간에 나는 행복해졌다. 10대 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꼽아보라면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매점에서 과자를 사 먹었다. 별 거 아닌 일에 울고 웃고 영화를 보고 인생 처음으로 뮤지컬을 보았다. 사랑을 나누고, 힘이 들거나 슬플 땐 숨길 필요 없이 나를 보여주고 표현했다. 잘 먹고 잘 잤다. 공부를 하고 압박 없는 목표가 있었고 미래는 밝고 희망차 보였다. 물론, 조금은 겁이 나지만 조금은 알고 있었다. 내게 숨겨진 힘이 있다는 걸. 내가 아는 나보다 나는 조금 더 크고 강하다는 걸. 그리고 쓰러지더라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란 걸. 


지금 돌이켜보면 극적으로 보이는 이 변화를 살고 있을 땐 전혀 기적처럼 느껴지지도 놀라운 일도 없이 모든 게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였다. 나는 몰랐다. 그저 운이 좋아 편견 없고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던 걸로만 여겨왔다. 그러나 생각보다도 나는 더 운이 좋고 세상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또 삶을 바꾸기 위한 마지막 용기로 다른 선택을 한 나의 의지가 없었다면 그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알겠다. 약 두 달간(기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의 정신과 입원이 나를 치유한 진정한 방식을. 그저 몸과 마음이 휴식을 취하고, 약을 먹어 호르몬이 바뀐 것만이 아니었다. 살아갈 희망을 얻을 생각의 전환을 한 것 만이 아니었다. 진동을 바꾼 거였다. 기분이란 이름으로 다른 일상을 체험하며 진동수가 올라간 것이다. 나의 존재 상태와 자아 관념을 바꾼 거였다. 너무나 운이 좋았다. 이제까지 짐작했던 것보다 그때의 정신과 입원 경험에 훨씬 더 감사해야 마땅했다. 무의식적으로 그 병원에서 지낸 경험이 기분이 좋아지는 진동 상태에 익숙하게 나를 준비시켜주었다. 



그 병원에 가기 전 동네 신경정신과에 용기를 내어 진찰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병실 분위기, 성의 없고 영혼 없어 보이던 무미건조하던 의사의 표정, 채 5분도 되지 않아 진찰은 끝이 났고 이름 모를 약을 설명도 없이 받아들였다. 그 약봉지를 발견한 아빠는 처음으로 내게 화를 냈다. 그런 몹쓸 곳은 가는 게 아니라고. 울었다. 너무 슬펐다.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보다 아빠의 상처받은 눈빛을 보며 내가 아빠를 그렇게 만들 만큼 몹쓸 짓을 했다는 사실이 날 너무 슬프게 했다. 정신과는 내게 슬픔, 어두움, 절망으로 최초로 연결되었다.만약 다음에도 진찰받으러 간 곳이 그런 분위기의 정신과였으면 내 삶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자살 시도 실패 후, 세상 처량하고 한심하게 돌아온 나는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그래. 살아야겠다. 죽을 순 없으니 살아야지. 다시는 죽는다는 말을 생각도 하지 말 것. 뭐가 되었든 일단 살아, 그게 앞으로의 네 과제야. "학교에 못 다니겠어." 내가 뱉은 말과 소망은 그거 하나였다. 그땐 너무 바보같다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덕에 변화가 가능했다.


내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은 다행히 딸을 정신과에 데려다주었다. 시체처럼 차에 앉아 엄마 손에 끌려간 곳은 익숙한 대학 병원의 정신과였다. 사람이 무척 많았고 눈이 부실만큼 조명은 밝았고 건물은 깨끗했다. 나는 마지막 환자였다. 처음 만난 안경을 낀 여자 선생님은 밀려드는 환자로 지쳐 보이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10분가량 진료 동안 온전히 내게 집중해 있었다. 왜 학교가 가기 싫냐는 질문부터 자기 예상과는 다른 학생이 들어와서 놀랐다며 친근하지만 거리를 좁히지 않고 하나씩 차분하게 내 상황에 대해 묻고, 내 말을 경청했다. 어떤 비난도 판단도 감정의 동요도 없이. 그리고 선생님은 우울증이란 진단명과 함께 당장 입원하는 게 좋을 거라고 권고했다. 



첫날 엄마와 헤어지기 전 엄마의 눈물을 기억한다. 분명, 엄마 아빠는 많이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 아빠의 우려와는 달리, 그 정신과는 내게 파라다이스 같은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우울하고 힘없이 지내던 건 길어야 하루 정도였을까. 맛있는 밥, 깨끗한 병실과 쾌적한 환경, 물리적으로도 잘 정돈되었을 뿐 아니라 그 어느 곳보다 정신적으로 안락하고 따뜻하게 느껴졌으며 공정하고 민주적이어서 꿈속에서 존재하는 이상 사회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독립적이고 친절하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지켜주고 존중해주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무도 상처를 주거나 곤란하고 무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심스러웠으나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며 묘한 연대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며칠 지나면 너무 잘 먹어서 몸이 무거워지니 운동을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해주던 문창과에 다니는 대학생 오빠는 책 읽는 내가 기특하다며 미하엘 엔데의 책을 여러 권 빌려주었다. 이후에는 진로 고민도 들어주고 문창과에 오지 말라는 조언을 해준다. 


병실의 수칙이나 주요 안건은 매주 대회의실에 모여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내가 입원할 무렵 대표 회장님은 나보다 두 살 어린 맑은 눈의 남자 학생이었는데 똑 부러진 말투에 빛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간호사와 의사분들은 모두 친절했고 우리를 유별나게 여기지 않았다. 농담을 하고 안부를 물었다. 


쉬는 시간에는 함께 탁구를 치고 가끔씩은 회의실에서 빔 프로젝트로 영화를 보았다. 영화 선택도 우리에게 있었다. 원하는 만큼 혼자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물론 폐쇄 병동이라 병실 밖을 나갈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언제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치유를 하고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안심과 위안이 있었다. 그 병원에 있는 동안 외롭지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햇볕이 맑은 날은 햇볕이 맑아 좋았고 비오는 날의 창은 운치가 있어 좋았다.


함께 쓰는 병실에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께 친절하게 말동무를 해드리고 움직이는 걸 도와드렸다. 실제 친할머니와는 전혀 친하지 않던 내게 그건 색다른 경험이자 새로운 기쁨이었다. 병실 사람들은 나를 아껴주고 예뻐해 주며 맛있는 간식을 나눠먹었다. 나가기 3주 전 입원한 단발머리의 다소 시니컬하지만 똑똑했던 10살 차이 언니에겐 당돌하게도 OO 씨라고 이름을 불렀다. 언니는 내게 삶의 괴로움을 말했고, 나 역시 내 몫을 나누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외출을 신청했다고 하니 다 죽여버리고(?) 오라고 힘찬 응원을 해주었다.


휴식 때문이 아니었다. 약 때문이 아니었다. 기쁨 덕분이었다.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일상을 찾았다. 평온하고 온전한 한 존재로 존재하는 법을 다시 기억했다. 책을 좋아한다는 거, 산책을 좋아한다는 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친절과 호의를 나누고 연결되는 걸 좋아한다는 거 그걸 거기서 다시 배웠다. 그곳의 경험이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나누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18살에서 19살이 되던 그 시기, 평생 아껴줄 소중하고 친구와 연결된 것도 우리가 서로 용기를 내어 다가가고 마음을 보여주고 규칙을 무시하고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즐겁게 공부를 하고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건 단지 우연이 아니었다. 18살 삶이 괴로웠기 때문에 보상하기 위해 생긴 반동 작용 같은 게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미 난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던 거다. 편안함과 여유 속에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진동을 간직한 채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다. 


다시 생각하면 그 시절 나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운이 좋았다. 그 병원으로 끌고 가준 엄마, 마음을 담아 진찰해준 의사 선생님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주던 상담사분들, 다정하고 섬세하던 간호사 분들, 그 시절 병동에서 친구이자 동료가 되어 지지하고 애정을 보내주는 경험을 나누게 해준 많은 사람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때도 그들을 좋아했지만 그게 엄청난 사랑이자 기적이란 걸 몰랐다.


 고마워요, 고마워. 그때 겪은 정신과 입원 경험 덕분에 내 삶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오늘 깨달았어요. 나의 진동을 바꿔줘서 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게 함께 해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고마워요.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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