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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Feb 26. 2022

나의 슬픔, 너의 슬픔

A는 연락을 할 때마다 나의 모든 주변인의 안부를 함께 물었다. 엄마, 아빠, 오빠와 새언니 그리고 친구들.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A에게 얘기한 적 있는 사람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의례를 행하듯이 정성을 다해 물었다. 그들이 잘 지내고 있냐고. 대부분의 나날 다행히 그들은 건강하고 별 일이 없어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안녕한 게 그에게는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너무 많이 동화되어 있어서 친구에게 안 좋은 소식이 있으면 마치 내일처럼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고 그는 말했다. 나의 안부를 확인하려면 친한 사람들의 안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나는 내게 물든 슬픔에 조금 당황하고 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보다가 옮겨 묻은 감정을 다루는 게 생각보다 더 서툰 사람이란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 슬픔과 고통에 허우적대고 그것을 잘 보내줄 방법을 찾는 데 골몰하느라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위로하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끼는 사람들이 부당한 일을 겪거나 하늘도 무심하게 느껴질 만큼 인생의 허망함과 마음이 찢기는 고통을 겪을 때 나는 밥을 잘 넘기지 못했다. 그의 말을 듣고 그와 함께 울고 그와 곁에 있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가 혼자 있고 싶으면 어쩌지, 혼자 슬퍼하고 아파할 시간을 존중해주는 선택지 앞에서 갈등한다. 그 답은 상황마다 사람마다 시간마다 공간마다 달라질 거고, 나름 선택의 문제 앞에서 신속하고 명확하게 결정하는 나는 그 때만큼은 조금도 자신할 수가 없다. 내가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내가 그 사람의 슬픔을 내 일처럼 슬퍼하는 게 그에게 위안이 되는지 오히려 더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아닌지.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내 몫의 슬픔과 고통을 희석하는 작업 또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 슬픔에는 면역이 생겼다. 내가 나를 알아서 두렵지 않다. 꽤나 괜찮은 매뉴얼을 만들었고 경험상 그 매뉴얼은 언제나 통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래에 분명 괜찮아질 거다.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문제가 생겨도 시련에 아파도 시간이 조금 걸릴지언정 이걸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서든 수용할 테고, 그 후의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내게 희망이 되어준다. 


그러니 슬픔이 찾아와도 기쁨을 찾자고 생각했다. 슬픔과 두려움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기쁨과 사랑 깨달음으로 변모하는 걸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픔을 보고도 슬퍼하는 동시에 기뻐하자고 생각했다. 이 슬픔이 내게 말하는 메시지를 귀기울여 듣고, 그걸 수신하면 나는 곧 더 기뻐질 것이기에.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슬픔은,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 앞에서는 나는 한 없이 무력하다. 내가 겪은 적 없고 나는 그가 아니기에 영원히 그 슬픔을 가늠할 수 없다. 괜찮아질 거라고 별 거 아니라는 위로를 함부로 건넬 수 없다. 내 몫의 슬픔 밖에 결정할 수가 없다는 그 사실이 좀 슬프다. 내가 슬퍼도 그의 슬픔이 줄어드는 건 아닌데도 나누어질 수 없단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좀 슬프다.


그가 내가 필요할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단단하게 있어주자 생각했다. 내겐 지금 슬픈 일이 없으니 세상에 눈물과 슬픔을 더하지 말고 그를 만나는 날 그의 슬픔을 나눠갖기 위해 밝고 평안한 에너지를 유지하자고. 그러나 결국 슬픔에 리셋되었다. 근원에 단단하게 묶여있던 연결고리는 느슨해지고, 건강하고 평온하던 일상에는 슬픔이 젖어들어 빛바래고 헐거워져 마치 내가 슬플 때처럼 나는 많이 먹고 모든 걸 잊으려는 듯 재미도 없는 영상을 보고 손목이 아프도록 게임을 하고 있다. 


A의 말이 맞았다. 잘 지내기 위해서는 내가 아끼는 모든 이들이 잘 지내야 한다. 


그가 기쁜 모습을 상상할까 하다가 그건 너무 이기적인 바람 같아서 내게 찾아와 슬픔에 관해 말해주는 상상을 했다. 충분히 마음껏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어느 날 기적처럼 슬픔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아침을 맞기를. 너의 슬픔에 서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슬픔을 홀로 키우지 않고 기다리는 일.


오늘 밤 부디 네가 잘 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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