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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18. 2022

낙성대, 변하기에 변함없을 그것

장소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사람과 함께였기 때문에



내게 낙성대는 그립고도 친근하고 재기발랄하지만 어쩐지 차분한 아지트다. 고향보다는 자유로운 이방인이 될 수 있고, 지칠 때 생각나는 익숙한 휴식처. 그 이미지를 만들게 된 연유야 여럿 있겠지만, 역시 라라님@roundyround 과의 만남이 결정적이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마주친 적 없던 우리는 'Mi Cubano' 출간을 기념하며 '에잇톤'이라는 낙성대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1년 전쯤 다시 만날 때도 역시 낙성대였다. 일회적인 만남에서 나아가 주기적인 관계를 맺기로 했다. 뭐가 될지 모르는 대화를 시작했다. 오로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겠다는 나의 모호한 꿈에 동참해주기 위한 행위로.


자주 가는 카페와 식당을 상호만 듣고 그가 척척 알아듣는 게 신기하고 그 맛을 나누고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있는 줄도 몰랐던 카페나 식당을 소개받을 땐 보물 지도라도 공유한 기분이 들었다.


1년이 지나 2022년이 되어 화창하고 찬 바람 부는 겨울, 다시 낙성대.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저 최고의 낙성 Day를 보내보자며 우린 기꺼이 다시 만났다.





삶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무한의 나선형을 따라 돌고 도는 여정이란 걸 얼마 전에야 실감했다. 1년 전과 우린 크게 다르지 않다. 난 다시 혼자가 되어 내게 몰두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세상의 모진 풍파로 인해 한국에 잠시 발이 묶여있다.


1년 전 나는 겁에 질려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용기였는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와 보낸 시간은, 아니 그와 나눈 대화는 너무나 지독하리만큼 따사로운 햇살 같아서 방어막을 뚫고 나를 비추었다. 흡사 각성 물질을 들이킨 것처럼 원래의 나보다 세졌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아니 그를 사랑한다. 어쩌면 그를 통해 비춰 보이는 내 모습을 사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을 다르고 희귀한, 그러나 늘 원래 나라고 믿었던 본질에 가까운 모습이 그를 만나면 저절로 투영되곤 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잘 지냈죠. 아무 일도 없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어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개요라도 짜야 하나 생각했어요."



다시 길을 잃고 방황하고 불안할 때는 모든 게 원점처럼 느껴진다. 지난 교훈이 부족해서 아직 성장이 충분하지 않아서 또다시 이렇게 흔들리고 고통스럽나 의심이 든다. 보람없이 허무하고 허망한 삶. 그러나 의심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돌이켜 보면 우린 분명 한 바퀴를 돌아 이곳에 이르렀다. 삶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착각이다. 영원한 안정도 완성도 없다. 살아있는 한 계속된다. 비슷하게만 보이는 길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의미로 오르고 또 오르고 또 오르기. 그것에 불안해하거나 의문을 품지 않는 여정, 그게 내가 찾은 요즘의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그도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다. 삶을 지속하는 한,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마지막 슬픔이 가득했던 그의 얼굴은 전쟁과 지혜의 신 '아레나'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제까지의 일을 모든 사람과 만나 한 단락을 매듭지어야 했다. 앞으로의 양상은 전혀 다를 것이기에. 같은 문체도 같은 문장도 없을 것이기에.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보이지만, 자아상 하나가 각성하면 그 모든 게 순식간에 변한다는 걸 알기에.



명예를 원하지만, 전면에 나서고 싶지도 주목 받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말은 나의 말과도 같다. 원하는 게 있고 누가 해줄 수 없음을 알지만, 수선을 피우며 끊임없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그 과정이 덧없고 피곤하다. 나 역시 리더가 되는 건 질색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을까?


그가 전쟁을 벌이기 전, 낙오된 나 역시 홀로 조용하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있지도 않은 실체도 없는 그게 뭐라고.'


본질대화클럽 그거 하고 싶다고 다른 사람을 상처 주고 세계를 파괴할 땐 언제고, 뒤돌아 혼자 남자 모든 게 자신 없고 부질없고 허무하고 씁쓸했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예 치워버리자. 그냥 다 잊자.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단 걸 알면서도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저는 굳이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을까요?'


...지독한 환멸이 찾아온다. 기쁨은 잠시다. 아니 그는 말한다. 그저 공감대를 이룬 그 에너지장에 취해 있었다고. 기쁨에 취해있었던 것뿐이라고. 완벽한 동상이몽을 꾸었던 걸 알게 되었다고. 현실은 가시밭길이다. 혼자서도 아프고 따갑고 지독한데 거길 다 함께 걷자 하면 그야말로 비극의 드라마라고.


그렇지만 알고 있다. 그걸 놓는다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혼자서 안온한 일상을 만든다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차마 울부짖으며 원망하고 미워하고 후회할지라도, 지독한 환멸이 느껴지고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한들. 다시 돌아가 함께 걷는 게 자신의 길이라는 걸. 그게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에게 말했다. 나라는 사람의 최초 사념이자 생각은 어쩌면 단 8글자로 정리된다고. '이해받고 싶은 욕망' 단지 그것뿐이라고. 모든 게 고작 그것뿐이라고.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내게 이 욕망을 충족해준 선물 같은 사람이다. 당신을 좋아하다 못해 어쩌면 내 안에서 화이트 투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고백했다. 무의식 속 롤모델, 멋지다 못해 어쩌면 당신을 이상화했을지도 모른다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과거엔 당신과 같은 길을 손을 맞잡고 가고 싶었다. 그 길에 변함없이 든든하게 영원히 있어 주고 싶었다. 어쩌면 당신 뒤에 숨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리더는 고되니까. 앞에 나서는 건 너무 많은 용기와 강함이 필요하니까. 원피스의 루피처럼 헌터헌터의 곤처럼 당신을 선망했다. 용기와 가능함을 현실로 이끄는 씩씩하고 아름다운 당신을.



그러나 당신의 위성이 아니어서 그 자리를 그저 뱅뱅 돌 수 없단 걸 알게 되었다. 분명 우린 같은 태양계를 공전하고 있는, 같은 세계의 사람이지만, 나의 궤도와 당신의 궤도가 다르다는 걸. 그건 나쁜 것도 아픈 것도 아쉬운 것도 아니라는 걸. 다르지만 같다는 걸. 아주 어렵게 아주 힘들게 아주 느리게 아주 아프게 1년간 그걸 배웠다.



전 영원히 In이에요.


조금 떨어져서 다른 궤도로 돌고 있지만, 저 역시 in입니다. 씩씩하게 배에 힘 꽉주고 저의 길을 걸어갈게요.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묻지 않고 계속. 그리고 당신의 승전보를 기다릴게요.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카페는 미용실로 변해버렸고, 만화방은 망해 문을 닫았다. 정다웠던 골목은 왠지 을씨년스러워지고 개인 상호는 프랜차이즈로 변해버렸다. 그렇지만 반대편 골목엔 그보다 안쪽 골목엔 개성 강한 카페와 음식점이 삼삼오오 생긴다. 오늘처럼 우리는 또 걷다가 우연히 맛있는 커피집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한, 변화는 숙명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확인할 거다.


어떤 모습이 되든 우리가 나누고 체험한 서사는 낙성대라는 단어에 영원히 기억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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