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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Mar 21. 2022

꿈은 혼돈을 말해준다.

심란한 마음은 심란한 꿈을 불러온다.

간밤에 심난한 꿈을 꿨다. 내용이 잘 파악이 안 되는 분절된 꿈에는 유명 연예인들이 등장했다. 유재석, 보아, 박보검... 등등등... 잘 생각은 안 나지만 관찰자 시점이거나 그 속에 꿈자아는 없었던 듯싶다. 마지막 꿈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침대로 걸어 들어와 얼굴을 만져보며 누구인지 물었다. 처음 만져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나 보니 하얀 침대보가 얼룩덜룩 흙탕물로 엉망이었다. 그 남자 오른발에 흙이 잔뜩 묻어있고, 바닥에도 자국이 남아서 발을 씻겨주러 화장실로 들어가 보니 곰팡이와 온갖 벌레와 해충이 바닥에 자욱했다. 남자는 엄살을 피며 발을 씻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샤워기 물을 최대로 틀어 바닥을 씻었다. 일단 저 남자 발부터 씻기고 대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인도를 다녀온 해탈한 사람이라는 컨셉을 지닌 책의 저자였는데 나는 그가 딱히 해탈했다기보단 너무나 인간적이란 생각을 했다.


세상 많은 진실된 이야기가 대부분 일리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모두에게 적합하고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가 도달한 단계 혹은 처지에 따라 좋은 이야기라도 그에겐 너무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삶을 고통이나 불행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나와 타인은 모두 연결되어 있어 하나라거나 나아가 사실은 모두 없는 허상이라는 말은 조금도 와닿지 않거나 오히려 삶을 더 힘겹게 만들 수 있다. 그것보다는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너만 생각해. 모든 걸 네 위주로 생각해.'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말은 이미 충분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한 자기합리화 도구로 작용한다.


요새는 내 자아를 덜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얼마 전까지도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리를 두거나, 거부감을 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옳거나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거추장스럽게 작용하는 내 안의 무언가를 완화시켜주기 때문에 모순적이게도 순전히 나를 위해 자아를 덜어내면 삶이 수월하고 편안하겠단 생각이 피어나고 있다. 원하는 만큼 내 자아를 다 채워보았나? 확인하는 질문에는 어차피 끝이란 건 없으니 여기서 더 가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고, 그게 주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에 일단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나 대답한다.


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애써왔다. 그걸 그만 두면 뭘 하고 싶지?라고 물으니 홀가분하면서도 멍해진다.
글쎄 그건 해봐야 알겠는데.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스포일러 없이 읽고 싶던 간절한 마음은 얼마 전 인셉션2를 스포일러 없이 보러 가기 위해 분투하는 행위로 꿈에 나타났다. 표지부터, 한 줄의 책 소개, 취향이 통했던 누군가의 리뷰와 추천에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내 생각이나 상태를 전복시키거나 고양시키는 책이 좋다. 이 책이 또 다른 미지의 영역으로 나를 데려갈 거라 굳게 믿었다. 책이 배송되자마자 그 자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읽고 또 읽어나갔다.


많이 아쉬웠다. 책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고, 책은 지적이고 솔직했다.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도 알겠으나 내게 필요한 메시지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방식보다도 문체보다도 지식보다도 철학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구나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그의 철학에 매료되진 못했다. 다시 다른 날 읽으면 이 소감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애니메이션 소울처럼.. 좋아할 거라고 강력하게 믿게 된 무언가를 실제로 접해보고 좋지 않았던 적은 손에 꼽기에 여러모로 생각날 책이다.



자연법칙은 존재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 자연법칙에 동화되어 일어날 일을 상상하지, 자연법칙과 반하는 일어날 리 없는 일을 상상하는 건 어리석다는 말을 읽었다.(아마도 오쇼의 책) 현자도 바보도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풀어야 하는 과제가 하나 있다면, 아직은 이게 자연법칙인지 사람들이 만들고 합의한 임의적인 관습인지 구분하기 애매하다는 것.


무언가 내 안에서 일단락되어 평화로워지면 기다렸다는 듯 다른 혼란이 날 집어삼킨다. 그렇지만 괜찮다. 계속 흐트러질 거고, 그럴 때마다 가다듬기 위해 전력을 다해 봉합하고 나면 바로 다시 또 흐트러질 거다. 그래. 받아들이자. 혼돈과 불안은 평온의 다른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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