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 IS REAL !
2021년 10월에는 삼화사에 갔다. 당시 충분히 은둔 중이었으나 자연과 고요 속으로 더 숨어들고 싶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으나 여전히 심장이 찌릿했다. 여전히 내 안의 소리가 들었고, 그걸 용해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삼화사에는 편지를 쓰면 6개월 후에 배달을 해주는 느린 우체통이 있었다. 거기다가 편지를 넣으려다가 갖고 온 일기장에 6개월 후 내게 편지를 썼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젯밤에 갑자기 그 편지 생각이 났다.
편지를 읽다가 울어버렸다. 내가 내게 쓴 편지를 읽고 울어버리다니. 그 애는 아무것도 몰랐는데도 마치 지금의 상황을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편지를 썼다. 그 애는 최대한 다정한 말로 조심스럽게 자기 안에 남겨진 모든 사랑을 가득 담아 진심 가득한 편지를 썼다. 그 사랑의 깊이가 너무 가득해서 나는 편지를 읽다가 왈칵 눈물이 터져 한참을 소파에 누워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확신 없이 적어둔 그 애의 그랬으면 좋겠다가 현재 내 모습이었으며 나는 그때와 너무 변한 동시에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사랑, 사랑, 사랑, 그리고 또 무한한 사랑만이 존재했다.
처음 춘자의 글을 읽고 충격에 빠진 날이 생생하다. 이 책에 '주말에 도쿄는 만실'의 제목으로 수록된 글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글이고, 당시 이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글을 쓴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이 혼돈에 가득 찼다. 나는 글을 이해하고 싶어서 읽고 또 읽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그의 예전 글을 되짚어 보는데 글을 읽을수록 미궁에 빠졌다. 그런데 그 낯선 감정이 내 온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온몸이 외쳤다. '이 글은 중요해, 여긴 뭔가 있어!' 어지러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을 남겼다. '이거 뭐죠? 너무 좋아요. 분위기 파악 좀 하고 올게요.'라고. 그리고 활짝 악수하듯 화답하는 춘자의 댓글이 달렸다. 이 날이 춘자를 처음 만난 날이다.
춘자를 실제로 대면한 날 2차 충격이 이어졌다. 만나기 전까지 그의 글을 읽었고 만나기를 고대해왔다. 뭐랄까, 춘자는 언제나 예상을 뒤엎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밝은 에너지에 압도당했는데, 그 밝음은 어둠에 종속되지 않은 절대적인 밝음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아주 천천히 차곡차곡 입자 하나하나를 밝힌 공고하고 굳건한 밝음이었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행복해졌으나 정신을 쏙 빼는 공허한 이야기는 오고 가지 않았다. 그는 심각하거나 어려운 주제의 이야기도 명쾌하고 쾌활하게 만드는, 아니 그 구분조차 무의미한 바보 같은 짓이란 걸 자각하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내 주변에 춘자 같은 사람은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처음 보는 낯선 존재(??)다. 동시에 그의 말대로 그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친화적이라서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는 쉽게 글을 쓰지 않는다. 문학적인 가치 판단의 혼동이나 결과에 관한 부담 같은 문제가 아니라, 언어가 가진 한계와 모순을 아쉬워하고 진짜와의 괴리를 뼈저리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 간극을 끊임없이 최소화시키는 경건한 의식과도 같다. 그는 그가 느낀 삶을 최대한 생생하고 누락 없이 전달하고 싶어 한다. 그는 내게 '진짜를 만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뱉은 말은 모두 행동이자 삶이기 때문에 그의 글 역시 삶만큼 변환되려면 각고의 에너지가 투입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정으로 그의 글은 영원히 그의 삶을 따라잡지는 못할 거다. 삶의 결정체를 빚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삶을 유예할 수도 없이 그는 걷고 또 걷는다. 아주 작은 일부분, 국소적으로 그의 글이 내비치지 않는 어떤 면을 운 좋게 알게 된 나의 관점에서 그의 글은 멋지지만, 글로 쓰이지 않은 공백의 보이지 않는 삶의 공간은 더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글은 곧 그 사람이 아니며, 글에 모든 걸 담을 수 없단 사실을 확인한다.
뉴욕으로 떠나는 날, 남미 여행 내내 나와 함께 했던 휴대용 밥솥을 공항에 버렸다. 밥순이의 마음은 찢어졌다. 입지 않을 옷, 신지 않을 신발까지 버리고 나니 3KG 정도가 줄었다. 위탁수하물 추가 비용 없이 저가 항공을 타고 싶은 마음에 숙소를 옮길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덜어서 10KG이 안 되는 배낭 하나만 남았는데 버리고 싶은 마음과 지니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싸운다. 이렇게 계속 무언가를 하나씩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을 하고 있다면 나는 어디까지 버릴 수 있을까. 내 손에 남을 마지막 물건은 무엇이 될까. 내 곁에 남을 최후의 사람은 누가 될까. 나는 입고 입던 옷까지 모두 벗어 버리고 알몸이 될 수 있을까. 갖고 있던 모든 관계를 끊어 내고 기꺼이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이 낯선 여행 이 낯선 세계, 춘자, 창문을 닦자, -179p
그렇지만, 이미 읽어본 적 있는 글인데도 몇 단락을 읽다가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슬프지도 눈물이 나올 구간이 아닌데도 그 글에는 그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가 말하는 진짜의 에너지로 빼곡히 차있어 저절로 온 몸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이 책이 무슨 책이고, 어떤 책이다. 특정 사람에게 이런 이유로 추천한다는 그런 필요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말을 한마디도 붙일 수 없다. 그저 책을 통해 춘자를 만나보란 말 밖에는. 당신이 춘자를 만나야 할 운명이라면 단 한 꼭지의 글을 읽고도 당신은 당신보다 더 빨리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나처럼. 그러니 이 책을 읽으라는 권유도, 읽지 않으면 아쉽다는 볼멘소리도 할 수 없게 된다. 원리와 인연에 의해 그들에게 모두 닿을 게 자명하니!
이 낯선 여행은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익숙한 여행이지만, 영원히 확장되기에 영원히 낯선 존재다. 춘자를 만난다는 건 낯선 세계를 안아 들 마음이 필요하다. 미지의 것을 조우하려면 한계 끝 너머의 용기와 담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내게 여행이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그건 온갖 낯선 것들과 만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이며 낯섦과 마주한다는 것은 원래 불편한 경험이다. 자아, 내면의 목소리, 진짜 나 같은 걸 만나러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거니와 여행 중에는 나와 마주할 여유 따위도 없다. 여행의 과정에서 나를 만나게 되는 경험은 여행자의 손에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낯선 것들을 끝까지 용감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마주한 결과로 얻게 되는 보상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게는 뜨거운 가슴이 아닌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이 낯선 여행 이 낯선 세계, 춘자, 일상으로의 복귀, 168p
춘자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아직 춘자가 다 쏟아내지 않은 보물 같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다.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다이아몬드처럼 글은 정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표현하지 않아도 진짜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우주 공간 속 파장으로, 에너지로 필연적으로 기록된다. 이것은 영원하다. 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해 용기와 사랑으로 가볍게 무장한 춘자가 삶으로 써낸 실체이자 존재 그대로의 상태, 미래와 현재 과거를 연결하는 하나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내가 삼화사에서 쓴 과거의 편지를 읽고 사랑에 가득 찬 것처럼 춘자가 언제나 이 기록을 보며 사랑과 용기로 가득 차기를. 아니, 사랑과 용기를 가슴에 품은 춘자의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의 영원한 기록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