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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pr 17. 2022

오늘의 랜덤박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지? 이유는 없다. 그저 자고 일어났을 뿐이고. 아주 잘 자고 일어났을 뿐이다. 이유는 뭐든 껴맞출 수 있다. 간밤 꿈자리에서 화를 냈다. 요새 나는 꿈 속에서도 잘 화를 내지 않는다. 답답하거나 동의할 수 없거나 명백히 의도적으로 나 혹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수작에도 크게 대응하지 않거나 화를 내는 게 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난 밤에 속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화가 발산되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지금 기분이 좋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가 중요한 건 아니다. 외부의 자극이 없다면 비교적 일관적인 느낌 혹은 감정을 유지하는 누군가와 다르게, 내 쪽은 외부의 자극에도 반응이 달라지거나 외부의 자극 없이도 살아있다는 이유로 랜덤박스처럼 기분이 바뀐단 걸 안다. 그저 오늘은 기분이 가라앉거나 행동 면면이 조금씩 더 귀찮아 지거나 늘어지고 싶은 충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사소하더라도 결정을 내린다거나 지금 이 기분과 느낌 이 상태를 나의 본질이라 여기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 그 점을 명심해두어야 한다. 다시 찾아온 변덕에도 죄를 짓더라도 그저 용서하는 것.


이제 내게 죄는 단 하나이다. 내가 되고자 하는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더 좋고 아름답고 사랑하는 방식을 잠시 잊고 딴 생각을 하는 것. 그게 유일한 죄이다. 그리고 그 죄를 나는 언제든지 사하는 사치를 누린다. 용서한다.


별로 땡기지 않았지만 생각없이 그저 점심 시간에 가까워 아침을 만들어내고, 나가기 싫은 핑계가 잔뜩 떠올랐지만, 천천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으니 어느새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도서관에 다녀오니 40 page 남겨둔 책을 읽는 게 자연스러워보였고, 그 책을 읽고 나니 80page 가량 남겨둔 소설에게도 손이 갔다. 20분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그 별로 좋지 않던 기분도 사라져 있었다. ... 대체 그는 누구지? 어디로 갔지?


소설책을 읽고 마음이 동해 소설을 쓴다면 과연 그건 내가 쓴 소설일까? 그와 같은 에세이를 쓰고 싶은 마음에 그의 에세이를 한줄 한줄 소화시키듯이 읽고나서 잠든 후, 다음날 쓰게 되는 그 글은 표절일까?


사실은 세상에 내가 만든 거라고 하나도 없다. 내가 자리를 비워두고 생각하며 잡아 내는 신호가 나를 통해 살아낼 뿐이다. 그러니 변덕스럽다고 분류되는 이 존재의 삶에 좋다 나쁘다 꼬리표를 붙일 필요는 없다.


아니, 우리가 모두 같은 한 존재로부터 나오고 한 목적을 향해 달려가더라도 그래도 이 삶의 모습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말인가. 이게 허상이란 이유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시작과 끝, 본질을 중시하는 이에게는. 그렇다해도 역동적이고 세부적일 다름의 차이를 확고히 확인하며 즐거워할래. 같은 걸 알면 다른 게 더 신기하고 신비하잖아. 지금 이 존재로 살아가며 분리된 이 삶을 채우는 세부적이고 사소한 디테일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그 생동감에 전율하고 싶어. 그 모든 것에 편향된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며 사랑하고 싶어. 다 허물어질 사라짐을 속상해 하지 않은 채로 순간의 패턴을 사랑할 수 있잖아. 언제까지라고 묻지 않겠어. 그저 그 다름이 일어날 때 웃고 다름이 너무 달라 울고 다름이 너무 달라 깜짝 놀라야지. 왜 다른 지 파헤쳐야지. 다만 이유를 묻진 않겠어. 그 모든 다름이 기쁨을 주고 즐겁게 하니까. 불쾌한 감각과 확인되지 않고 날뛰는 감정까지도.




글이 정신 없는 건 오늘 바이오리듬 지성 점수가 -97%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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