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윤 Jun 02. 2022

어떤 기묘함

그를 속속들이 다 아는데도 거울을 보는 스스로가 낯설다.

가끔 멈춰 서서 거울을 뚫어져라 본다. 거기엔 익숙한 사람이 하나 있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늘 나를 볼 때마다 피곤해 보인다고 말하고 나는 웃는다. 같은 얼굴을 보고 다른 이는 얼굴이 좋아졌다 말한다. 로션을 바르거나 화장을 할 땐 거울을 슬쩍 본다. 어떤 목적이 있을 땐 멈추는 법이 없다. 집으로 혼자 돌아와 마스크를 벗으면 커다란 정면 거울이 보인다. 약간 그늘진 조명 사이의 그는 언제나 날 보고 있다.


어느샌가 그는 날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다. 한평생 봐온 얼굴이다. 그다지 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요새 나는 그가 참 낯설다. 그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타인 일리 없는데도 우리 사이엔 전도율이 높고 투명한 얇고 부드러운 막이 놓여있는 기분이 든다.



어제부터 오늘은 생각이 부유하고 방황하는 걸 걷잡을 수 없이 지켜보아야 했다. 영원히 확인할 수 없겠지만,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라고 여긴다. 생각이 삶을 주도할 때가 많다. 감정엔 끌려가더라도 사회적으로 조금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배웠지만, 누구도 생각이 내가 아니란 걸 한 번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위기 상황에서는 생각을 하라고 배웠다. 그래서 생각은 아군이자 믿을만한 동지였다.


언젠가 L은 내가 조종하기 참 쉬운 사람인 동시에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조종할 수 없다 말한 적 있다. 생각의 물꼬를 트기만 하면 생각이 범람하면 저절로 다음 행동은 예측 가능하다. 필연적이다. 그 생각의 주파수에 징후나 단서를 슬쩍 흘리기만 해도 어김없이 예민한 주파수는 작동하고 알고리즘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생각이라도 내 주파수와 진동하지 않으면, 결코 생각이 내 것인 척 위장할 수가 없게 된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생각에 있어서 완고하고 보수적이고 꽉 막혔고, 그 점에 만족해한다.



5년 전 가족 여행을 가는 게 끔찍하게 싫어서 설득하고 달래야 했다. 물질적으로 부담하는 게 하나 없었는데도 불만을 삭힐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가족의 일원으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성실히 여행에 참여했다. 그런데 어제는 주도적으로 진심으로 가족 여행을 너무 가고 싶어 져서 하루 종일 여행 생각뿐이었다. 그런 스스로가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할 만큼 했거나 오늘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자야 할 시간이 넘어서까지 생각을 멈출 수가 없는 나를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난폭한 운전수처럼 가족 여행이란 미션은 나를 송두리째 잡아먹고 놔주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완전히 백지장처럼 비어지곤 하는데 오늘은 1분도 되지 않아 명상을 하는데도 내내 어제 못다 한 가족 여행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온전히 날 내주어야 했다. 대충 아침을 차리고 아침을 먹으면서도 신경 한 구석엔 그 생각에 매몰되어 있어 오늘 하루를 또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겠다고 각오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해야 할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독촉의 의미로 카톡을 날리고 싶었다.



 오늘은 이걸 연습해야 하는구나. 기다려.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그저 나의 일이면 급할 게 하나 없었지만, 가족 여행에는 여러 가지 제약 사항이 있고 내 마음대로 하거나 유동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 그걸 모르는 거 아니고, 그걸 내 일처럼 여유 있게 바라보는 건 나라는 사람이 굉장히 어려워하는 일 중 하나였다.


1시간 반의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머리가 맑은 상태에서 신문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글을 쓰다가 3일 차에서 막혀 멈췄다. 제목을 정할 수도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의자에 앉아 음악의 힘을 빌어 일단 쓰기 시작하니 관성대로 몸과 생각은 글을 쓰기로 한 사람처럼 글을 썼다. 여행은 머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필라테스 선생님의 사정이 생겨 대신 원장님과 수업을 했다. 원장님은 정석대로 깔끔하고 세심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내 허리는 왼쪽으로 돌아갔고 어깨엔 힘이 잔뜩 들어갔고 골반은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다. 런지를 하자 허벅지가 비명을 질렀고 자세가 다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인내심 있는 말투와 부드러운 손길로 원장님은 내 자세를 고쳐주셨다. 1분 1초도 딴생각을 하지 않고 필라테스 생각만 했다. 시범을 보이기 위해 가볍게 나비처럼 힘겨운 자세를 아름답게 취하는 강사님의 몸을 보며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뭐 먹을지 고민하다가 또 한 번 쫄면을 해 먹기로 했다. 며칠 전에 먹어서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냉장고 재료를 소진해야 했다. 생각을 두고 몸을 움직이자 야채를 종류별로 보기 좋게 담아 군침도는 쫄면을 만들었다. 갑자기 TV에 문제가 생겼다. 짜증이 나는 건 아니었으나 20분 넘게 그걸 해결해보려고 애를 쓰는 나 자신을 보면서 쫄면을 방치하고 있단 사실을 의식했다. 임시방편이지만 TV에 유튜브를 연결했다. 견딜 수 없이 졸음이 쏟아져 참고 참다가 15분쯤 암막 커튼을 치고 잠이 들었다. 그때 난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알람 시계에 눈을 떴으나 영원히 자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어났다. 여행 관련해서 가족들에게 연락이 왔고 다행히 다들 협조를 잘해주어서 독촉하지 않길 잘했다 생각했다.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멈춰서 할 수 있는 선까지 행정 처리를 해두었다. 모두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아직 더 기다려야 했다. 5분만 더 기다려보다가 깔끔하게 단념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곧 독서 모임이 있고 나는 이제야 책을 빌린다. 책이 연체되는 바람에 L의 회원증을 빌렸다. 박완서의 '서 있는 여자'라는 소설인데 책이 너무 낡고 두꺼워서 놀랐다. 책의 상태를 보니 영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는 길에는 할 일이 많아 이번 달 도서 모임을 제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몇 달 동안 가보자고 마음만 먹고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던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항상 사람이 붐볐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이 창가에 햇빛이 비추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려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창문을 보며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완전히 매료되었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985년도 소설인데도 나는 그 정서에 빨려 들어갔고 내 머릿속엔 소설에 관한 생각이 둥둥 떠다녔다. 나도 모르게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과제를 할 때는 영화를 분석했다. 수업을 들으면서도 집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모든 영화를 하루 종일 분석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과제를 하면서는 빨리 배운 걸 적용해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고 싶다는 열정이 솟아났다. 그러나 그 생각과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물론 언제든 찾아올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를 망치거나 잡념에만 시달릴까 봐 고민하던 그 사람은 차분하게 앉아 소설책을 200page 가까이 읽고는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는 아주 천천히 고요하게 집으로 돌아와서 이내 거울을 본다. 신기하듯 천천히 꼼꼼하게 하나하나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얼굴을 바라본다.




생각이 내가 아니라는 그 말은 생각이 많은 나 자신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었다. 생각이 많은 게 문제라는 말도 아니었다. 생각이 이리저리 논리도 없이 마치 원래부터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듯 그 생각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 완전히 나를 집어삼키고 순식간에 분위기와 목표를 바꿔버리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묘하다. 항상 이렇게 살았다.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애의 생각을 나만큼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애에게 사로잡혀 나를 다 내준다. 동시에 그 애가 곧 내가 아니기도 하면서 나이기도 하다는 그 이상한 지점의 정류장에 도착한다.


그 생각을 사랑하고 그 애를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장막은 아주 지척에 두고도 낯선 타인이 된 듯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준다. 이전보다 그 애를 더 사랑하지만, 뭐랄까... 그에게 조금도 관여할 마음이 없다. 아마도 그 애가 인격체라면 퍽이나 내게 서운할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사라져 무심해 보일지도 모를 일이나 그 투정에도 그저 넌지시 웃을 뿐이다.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에 싸여 있는 게 익숙했다. 꼭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더라도 마치 나는 내가 곧 사라질 것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존재나 생각 감정을 알라기 위해 확성기를 틀어놓은 듯이 살았다. 그것이 내 마음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주었다. 거기 익숙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마치 원래 그러지 않았다는 듯이 살아보고 싶어 졌는데 금방 또 거기에 익숙해졌다. 이제는 SNS 들락날락거리거나 새로운 생각을 했는데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도 혹은 뉴스를 읽거나 다른 이의 소식을 몰라도 스스로 사라지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원래 그렇게 살았던 사람처럼.



그 아이는 적응력이 뛰어난 카멜레온 같다. 논리적인 차원에서 그 아이가 인격체였다면 정신이 나갔거나 적어도 신뢰할 수 없이 변덕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의 충동성과 변동성 그리고 순진함과 열정을 깊이 사랑한다. 그 사랑이 깊어질수록 점점 그 아이와 타인이 되어간다. 누구보다 잘 알고 영원히 함께하고 때로는 그 아이가 날 휘두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린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기묘한 실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 아이가 앞으로 어떤 생각을 할지 그래서 내게 뭘 하자 혹은 어떻게 날 사로잡고 내 삶을 뒤흔들며 주인 행세를 하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이의 그 얇은 장막은 볼 수 없는 날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나도 그도 세워둔 적 없이 원래 있던 장막이었으니. 내 삶에 그 아이가 있는 건 커다란 축복이다.  그 아이는 내게 영원한 신비이자 놀라움이고 골칫거리일 테니 그러니 그것을 잊지 않고 그에게 늘 친절하게 대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질문이 사라진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