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이 되어 가망조차 사라진 어둠 속의 정적,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장면 전환,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된다.
8월엔 내내 우울했다. 기침을 콜록거리고 목은 컹컹거리고 열은 오르고 후각과 미각을 잃었다. 누워있어도 몸은 불편하다 말했고, 앉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아팠냐고 묻는다면 그렇게까지 아픈 건 아니었다. 저 증상은 차례를 지키듯 하나씩만 찾아왔고 약국에서 사둔 약을 하루 정도 챙겨 먹다가 먹기 싫어 그만두었다. 울고 싶거나 눈물을 흘린 건 아니었다. 절망이나 비탄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누가 자는 사이 몰래 심장을 인공적 스펀지로 갈아 낀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매번 오고 가는 약간의 의욕이나 기분 저하와는 무언가 달랐다. 그저 기쁨이 인생에 사라지고 말았다.
일상의 잔잔한 물결 같은 찰나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재밌는 드라마를 볼 땐 몰입했고, 가끔 억지로 발걸음을 이끌고 하던 산책 중 불어오는 바람, 흔들리는 나뭇잎과 그 사이 비치는 햇살은 똑같이 아름다웠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래서 뭐?’
아무리 불을 붙여도 물에 젖어 제 기능을 상실한 심지는 불타오르지 않았다. 그 어느 것에도 반응이 없었다. 일주일을 기다리고 이주일을 기다렸다. 한 달이 넘었다. 그쯤 되니 딱히 문제도 의무도 없이 놀고먹고 평온한데도 이런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다. 사는 게 참 무가치하다고.
언젠가 L과 차를 타고 가다가 100억을 가지고 밈을 만들었다. 100억이 있다면 감시카메라 무시하고 엑셀 밟을 거야? 100억 있다면 그 차 샀을 거야? 이런 식의 if놀이였다. 혼자서 물었다. 지금 100억 있으면 좀 달랐을까? 답은 빤했다. 아무 소용없어. 결핍되거나 고통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100억이 있어도 원하는 게 없었다. 미치겠네.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 맘대로 해라. 아무리 괜찮아 보이는 타인의 삶을 임의로 빌려와 내게 적절히 껴 맞추어도 이미 고장 난 상태를 고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기쁨을 지각하는 경로 중 한 부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 무렵엔 영상을 미친 듯이 봤는데 평소 끊임없이 드나드는 생각의 통로조차 막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생각을 하기 싫어서 영상을 본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심심해서 어쩔 수 없이 영상을 보았다. 심장이 뛰는 사람이었는데 더미가 되었다. 글쓰기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어디 놀러 가는 것도 무얼 먹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그걸 해봐도 재미도 없었다. 문득 인터넷 속에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게 되면 현실에서마저 거의 사라진 사람이 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대수일까. 그래 봤자 원하는 게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 인정해야 했다.
나는 지금 우울하다. 우울증이 틀림없다. 우울증 말기 때 했던 생각들이었다. 일종의 마른 우울증이랄까. 8월 한 달을 우울증에게 잡아 먹혔다.
9월로 달이 바뀌었고 코로나가 회복되고 필라테스를 다니고 여름은 지나갔다. 우울함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아, 망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난 토요일 아침, 친구의 결혼식 앨범을 대신 찾으러 서울에 가는 L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꽉 막힌 길을 드라이브하는 편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8월엔 사실 누구 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L에게 말했다. 나 요즘 우울해.
그러자 L이 말했다. 네가 언제 8월에 기분 좋았던 적이 있나. 그런가? 설마…
그날 아침엔 꽤나 꿈을 많이 꿨다. 물론 8월엔 꿈을 꿔도 기록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고 모두 휘발되었지만 그날은 조금 기억이 났다. L은 꿈 내용을 물었다. 귀찮다는 듯 성의 없이 꿈 이야기를 했다.
“학교 같은 것 같은데 고등학생은 아니었어. 어쨌든 난 전교 부회장이었고. 그런데 뭔가 장을 하면 초능력 같은 걸 하나씩 부여받게 돼. 내 능력은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건데 물리적으로는 사라지는 게 아니야. 누가 내 몸에 닿으면 바로 찾을 수 있게 되는 거였어. 대충 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서 생각했어. 이건 누가 알면 완전 무쓸모겠구나. 그러니 절대 내 능력을 들키지 말아야겠다고.”
평소 꿈 얘기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는 L이 한 마디를 던졌다.
“오,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인데?”
“뭐가?”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
한 대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어… 맞네. 맨날 내가 하던 말이었네. 그 꿈속에서는 평소에 하던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초능력에 관한 생각이었지. 꿈속에선 내 편이 없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몸을 사려야 했다. 꿈속에서는 수첩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이제 그만 믿고 누군가의 약점을 적어 두자고 결심하던 참이었다.
“내 생각엔 그래, 너무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거 같다고.”
그 대화를 나누면서 틈틈이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흘렀다. 사실 꿈에서도 지쳤고 외롭다고 생각했다. 두려웠지만 책망했던 것 같다. 두려움에 휩싸이면 모든 건 순식간에 달라진다.
“있잖아. 적잖이 내게 실망했어. 그러다가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논쟁을 거뒀지. 그렇지만 사실은 실망스러웠던 거겠지.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건 괜찮은데 이렇게 확 손도 쓸 수 없이 나타나다니 그동안의 배움과 노력이 무쓸모네.”
“급해. 그게 어떻게 한순간에 돼?”
“30.. 아니 최소 20년을 공들였는데 그걸 한순간이라 부를 순 없지.”
“지금처럼 울적했던 순간만 모아봐. 그리 길지 않을 거야.”
그래 네 말이 맞다. 비슷해 보이지만 항상 다르다. 언제라도 나는 다시 또 이럴 수 있다. 이게 뭐 절대반지라도 있는 게 아닌데, 절대 반지처럼 또 기대를 해버렸구나. 이제 됐다고. 끝마치고 싶었나 보다. 그럴 리 없다고.
그 와중에 어제 보낸 카톡에 친구의 답장이 왔다. 분명 며칠 전까지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어떤 위로도 충고도 받고 싶지 않았는데 의욕이 없다는 내 말에 의욕이 없으면 또 어떠냐고 다정한 M의 전매특허 같은 말이 쓰여있었다. 심장이 따뜻해졌다.
“나는 M을 진짜 좋아하나 봐. 만난 것도 아니고 카톡으로 얘기 몇 마디 나눴다고. 좋네.”
돌아오는 길에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가슴속에 바람이 드나들었다. 뭔가 홀가분했다. 갑자기? 이게 이렇게 된다고? 어느새 내 심장은 물먹은 스펀지에서 내가 알던 생명체로 뒤바뀌었다. 저녁이 되자 놀토를 보며 신나서 춤을 추며 깔깔거렸다. 그 무엇으로 채워지지 않던 잿빛 회색 세상이 핑크빛 무드로 물들었다.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체온이 오르고 활기가 돌고 의욕이 넘쳤다. 명상도 하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모든 일에 거짓말처럼 의미가 붙었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즐겁고 명랑한 생각이 흘러넘쳤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쯤 되니 당혹스러웠다. 반갑긴 하지만 너무 하잖아. 급발진도 이런 급발진이 있나.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 다른 존재라고. 말 그대로다. 비유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