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윤 Oct 04. 2022

어둠 속에 누워

운세 앱에 따르면 이번 달은 뭘 해도 잘 되지 않을 거란다. 계획이나 약속이 어그러지고 어떤 소망이나 성취도 이루기 어려운 한 달이 될 것이기에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한단다. 무엇보다도 외부의 도움을 구하는 건 아무 소용도 없을 거라고 한다.



운세 앱을 신봉하는 건 아니지만 그저 무시하기도 어렵다. 10월이 된 지 3일이 채 지나지 않아 격한 감정 격동에 휘말렸고, 꽤 묵직한 계획이 벌써 두 번이나 틀어졌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금전적 손해를 봤다. 이렇게 보고 싶은 사람이 많았던 적이 있나 싶지만 괜히 내 불행이 옮을까 만나자 하기 망설여졌다. 정말 꼭 만나고 싶던 사람과 어렵게 약속을 잡았는데 일정 문제로 취소되었다. 그쯤 되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억지로 애쓰지 말고 흘러가게 둬야겠다고. 누굴 만나더라도 내 입장이나 고민을 내세우지 말고 되도록 상대방 입장에서 상대의 말을 잘 경청하는 게 방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번 달엔 조언을 얻거나 위안을 삼을 목적으로 누군가를 만나지 말아야 한다.



답답했다. 해야 할 일이 많고 의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생각이 많아 하나에 집중하기 어렵다. 어느 때보다 이성의 역할이 절실한 달이라고. 정신 차리고 그저 할 일을 해! 무언가 마음대로 안 풀릴 때 떡볶이를 해 먹는다. 오늘 점심 메뉴는 라볶이였고, 1.5인분을 먹어치웠다. 에너지가 필요할 때 꿈에서 먹고 또 먹는다. 어제 꿈은 꽤 생생했다. 기록하지 않아서 대부분 까먹었지만 어렵게 이룩한 자유를 다시 빼앗겼다. 꿈속 무뢰한 같은 남자 무리들에게 꼼짝없이 당했다. 그 후 반항을 했거나 그들에게서 탈출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바로 꿈에서 깼기 때문이다.



영상물 무얼 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The O.A. 1편을 보다가 불현듯 다시 생각이 날아들었다. 기다리기 싫다면? 그냥 다 엎어버리고 지금 당장 행동한다면? 공원을 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나의 현재와 과거는 뒤엉켜 알아볼 수가 없다. 어떤 게 현재이고, 어떤 게 과거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미래를 모른다는 것뿐이다.



9월 여행 가기 전날 밤 타로카드를 보았다. 그 여행은 아무 고민 없이 가볍게 즐기다 오면 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될 거라고 말했다. 카드를 섞다가 무심결에 뒤집어진 카드는 불완전한 양자택일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고, 아무리 머리를 쓰고 생각을 해봤자 결과를 알 수 없고 나는 무엇이든 선택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매일 밤 나는 울게 될 거고 크나큰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 깜짝 놀라 다시 한번 카드를 뽑았는데 그래도 카드는 인내심을 지니고 이번 여행에 무조건 가야 하고 결국엔 좋은 일이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 카드가 나온 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운명을 기다리는 사람에겐 8년마다 갈림길이 주어지는 것만 같다. 한 번 선택을 하면 당분간은 쭉 그 길을 군말 없이 따라가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는 내게 왜 선택을 해 놓고 자꾸 가보지 않은 길을 미련에 가득 차서 돌아보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입장에서는 호기심은 있어도 미련은 없었고, 딱히 뒤돌아본 적도 후회한 적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포털이 열리고 갈림길이 나타나자 알 수 있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그 길을 한 번도 놓질 못했고, 영원히 놓지 못할 거란 사실을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서 우회로를 택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것도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안의 틀을 깨고 자유나 꿈을 은밀히 쟁취하는 것뿐인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걱정해도 꿋꿋이 내 갈길을 가고야 마는 그런 빌런 같은 사건을 감히 혁명이라 칭할 수 있을까. 그런데 혁명이지. 내겐 혁명이야. 그게 네가 제일 못하고 두려워하는 거잖아. 이기적이고 개인주의 끝판왕인 주제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엔 언제나 타인의 입장을 헤아렸다. 차마 타인을 저버릴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건 여전히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줄 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하게도.



결행할 의지가 부족하고 두려워 미적거리는 것과 당장 성급하게 행동하고 싶은데도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건 무엇일까? 운명의 결단과 과거에 얽매인 충동적인 실수 이걸 결정하는 건 누구일까? 굳은 용기와 어리석은 치기, 무엇이 맞는지 누가 알려줄 수 있을까?


아무도, 아무도, 다른 이의 방책은 다른 이의 삶에 적용될 때 최적화된 방책일 뿐이야. 나는 결국 나만의 길을 가야하고, 지난 8년간 그것을 제대로 구분하기 위해 애써왔다. 너는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이제와 다시 자신을 의심한다면 나아갈 수 없다.



기다리는 건 독일까? 득일까? 무언가 결연하기로 맹세한 이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까? 때때로 나는 기다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봤어. 내 인생이 패턴대로 반복되고 있고 이 삶의 통속 드라마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실행하게 된다. 거기에 몰입해서 감정적으로 휩쓸 릴 때마다 나는 그저 내가 어리석게 느껴지고 두려움이 밀려오고 죄책감이 들어. 그럼 배려를 명목으로 난 다시 굴복하고 싶어지겠지. 자신감에 가득 차서 무엇을 할지 말하고 그것을 할 때마다 날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날 걱정하거나 비난하거나 동정할 것이다. 그건 어느 때보다 너무나 가슴 아프고 힘들 것이다.



타인의 결정이나 마음으로 선택을 내릴 수는 없다. 아무리 나와 가깝고 세계를 공유하는 사이라고 해도 결국 이건 나의 문제이다. 이젠 나만 생각해야 할 시간이 왔고, 다른 때 그건 방종이겠지만 지금의 나에겐 용기이다. 내가 고려할 유일한 건 마음과 몸과 영혼의 내밀하고 고요한 소리이고 그게 내가 진짜 원하는 길이니까. 그거 할려고 이번 생에 여기서 태어나기로 결정한 것이니.


타인의 변덕스러운 감정과 생각과 입장과 관계, 그건 감사하고 아름답지만 그것에 의지하거나 선택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더 많은 증거를 원한다고 보여줄 리 없다. 그의 말대로 차고 넘치게 증명 되었다. 필요한 모든 정보는 지금 내게 전부 주어졌고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다.



물론 이번에는 차분하고 평화롭게 기다려야겠지만, 내게 필요한 건 타인의 확신도 지지도 아니야. 굳고 강하고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차분한 마음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과 드넓은 사랑이다. 아프고 힘겹고 예측 불가능한 어떤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며 나를 뒤흔들고 주저 앉히더라도 동요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얼마든지 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초인적인 내면의 단단함이 필요하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



절실하고 성실히 살아갈 때 우주와 운명이 한 번이라도 날 버린 적 있었나. 약해 빠졌을 때 다 무너져서 깨져버리지만 결국에 지혜를 배우고 다음으로 나아갈 것이야. 이번에 하지 못한다면, 다음번엔 몇 배로 힘들 거고,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그러니 강해지자. 몸도 마음도.

매거진의 이전글 다른 사람, 다른 존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