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에는 부업(副業)과 본업(本業)이 있다. 전자는 여가 시간을 활용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유, 재미, 경험으로 하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생계와 관련이 있기에 책임, 의무, 구속과 같은 강제성이 뒤따른다. 상황에 따라서 부업을 본업처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업은 "여가 시간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사용할 수 있을까?"라는 점에서 조금은 여유롭게 일할 수 있다. 나에게 아르바이트는 남들처럼 평범하고 살고 싶은 바람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본업이었다.
나는 식권을 구매할 비용만 가지고는 대학교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막노동을 하기로 했다. 나름 다양한 경험으로 다져진 인생이라 자부했기에 막노동도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학교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인력 사무소에 전화했다. 담당자는 오는 순서대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다음 날 나는 새벽 3:00에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고 그곳으로 향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였다. 가장 먼저 도착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빼곡히 서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두 시간을 기다리자, 키가 작고 몸집이 다부진 아저씨가 나를 포함해서 아홉 명을 호명했다.
"OO 씨를 포함한 아홉 명 있죠? 밖에 나가서 차 타고 수산물 현장으로 이동하세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싸늘한 새벽 거리에는 승합차 두 대가 전등을 깜빡이면서 서 있었다. 한두 명씩 차에 탑승한 후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 나이는 50대 초반에서 60대 중반처럼 보였다. 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건설 현장이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앉아 있지?"
"왜, 나는 내가 고생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왜, 나는 계속 힘들지?"
덜컹거리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우울했고, 비참했고, 슬펐다. 다른 동기들은 따뜻한 방에서 단잠을 자고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났다. 신세타령을 더 늘어놓으려고 하자, 차는 현장에 도착했다. 나는 공사 감독의 지시에 따라서 임시 건물에서 옷을 갈아입고 지하 1층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기둥을 받치고 있는 쇠 파이프와 벽돌을 옮겼다. 현장은 너무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바닥에는 물이 고여있어서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디디면 넘어지기 쉬웠다. 그렇게 정신없이 두 시간 정도 일을 한 후 잠시 쉬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나에게 물었다.
"학생인 것 같은데, 몇 살이야? 노가다(막노동)은 처음이지?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일해?"
처음에는 대꾸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짧게 대답했다.
"대학생이요. 돈이 필요해서요."
그렇다. 정말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다. 식권 구매 이외에 간식도 사 먹고, 책도 세 권 이상 살 수 있고, 볼링도 몇 게임하고도 남을 돈이 필요했다. 내가 큰 욕심을 부린 것일까? 남들 하는 것처럼 대학생다운 생활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막노동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일주일에 삼만 원이 아니라, 육만 원만 있어도 대학생이다라는 자부심에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했다면, 막노동은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이었다. 그때 하루 임금이 육만 원이었고, 중개비 오천 원을 빼면 실수령액은 오만 오천 원 정도였다. 여기서 교통 비용을 제하면 하루 일당이 오만 원이 조금 넘었다. 이 돈을 벌기 위해서 나는 새벽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만 했다. 나의 키보다 두 배 이상이나 되는 파이프를 옮기고, 지게에 벽돌을 8단 이상으로 쌓아서 1층에서 지하 2층으로도 운반하기도 하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폐기물을 자루에 담아서 옮기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기도 했다. 몇 시간 땀이 비 오듯 일을 하다가 잠시 쉴 때는 추위와 오한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삶에 대한 좌절감이었다.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닌데, "누구의 도움 없이 언제까지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부모님과 다섯 형제도 있었지만, 다들 자신의 인생을 살아 내기에도 버겁다는 것을 잘 알기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이런 모든 상황이 싫었다. 능력이 없어 보이는 부모님이 미웠고, 용돈 한번 구걸할 수 없는 형제들이 싫었다.
다섯 시 삼십 분이 되어서 현장의 일은 서서히 마무리되었다. 나는 여느 날과 같이 대충 옷을 갈아입고 차에 올랐다. 그날은 유독 너무 힘이 들어서 계단을 올라갈 기운조차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겨우 문을 나선 후 말할 기운조차 없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만 원짜리 다섯 장을 손에 꽉 쥐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백열등 빛이 비치는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칙칙한 벽에 비친 그림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했어. 힘들지?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 네가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하고 멋있는 녀석이라는 것을. 너는 잘할 수 있을 거야. 다른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너이기 때문에 지금의 일을 해낼 수 있는 거야. 겁먹지 마. 그리고 주눅 들 필요 없어. 너는 할 수 있어! 왜냐고? 너는 오늘도 너의 꿈을 위해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 도전하고 있으니까!"
그랬다. 그때는 정말 내가 가난한 줄 알았고, 못하는 줄 알았고, 실패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안 될 것이라는 패배 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나는 그날 그림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 힘든 만큼 더 성장하고, 아픈 만큼 더 성숙하며, 괴로운 만큼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 했다. 일주일 밤을 새우면서 모델 하우스 현장 공사 일을 하고, 철근 절단 작업도 배웠다. 용접을 배워서 광명 KTX 건설 작업에도 참여했고, 삼성동 한 오피스텔의 마루 시공도 했다. 겨울에는 석유 배달을, 여름에는 대학로에서 배달원과 요리사로도 일을 했다. 그렇게 다양한 일을 하면서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더 큰 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군대를 빨리 제대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장이 나오기도 전에 해군에 지원했다.